빛의 계보를 따르는 사유, 가령 플라톤 철학에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모든 것이 이데아의 모방, 즉 현실은 그저 복제된 시뮬라크르 혹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림자는 그중에서도 가장 얇은 층위의 흔적이다.
그러나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주인공 슐레밀은 자신의 그림자를 팔고 부와 명예를 얻지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결국 파멸하고 만다. 그림자는 단순한 모조품이 아니라 빛과 몸이 서로를 증명하는 존재의 의미리라.
그래서 그림자는 이중적이다. 어떤 철학에서는 진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복사본이지만 어떤 서사에서는 존재를 지탱하는 증거가 된다. 계측할 수 없는 그 표면 위에 인간과 세계의 모든 무게가 무겁게 얹혀 있다.
삶은 언제나 하나의 원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층위가 겹쳐지는 자리에서 벌어진다. 원본이라는 주인공을 꿈꾸되 발치의 그림자를 버리지 않는 일이다.
덕수궁 Ricoh GRD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