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데이비드 실즈, 책세상)
플라톤의 철학에서 문학과 예술은 진리의 곁에조차 설 수 없는 존재였다. 단지 모방에 불과하며 인간의 이성을 흐리고 감정을 선동하는 위험한 장치였다. 그것들은 이데아의 그림자, 모사의 모사에 불과하므로 문학적 묘사는 근본적으로 이데아의 왜곡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원본과 모사, 즉 진리와 예술을 구분하며 위계를 세우고 구분과 배제를 낳아 불평등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진리는 위에, 문학은 아래에 놓였다. 원본과 복제의 위계, 중심과 주변의 구분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 위계는 단지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나아가 인간을 분류하고 배제하는 사고의 틀로 작동해왔다.
이 관점에 따르면 문학은 언제나 진리와 진리 사이의 틈, 실체가 아닌 허상의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런 허상들이 과연 누군가의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명확히 붙잡지 못하고 언어로 정식화하지 못한 무엇, 혹은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은 어떤 감정이나 사유가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구원은 언제나 분명한 명제보다 모호하게 작동하니까.
반면에 들뢰즈의 사유는 이 오래된 위계를 뒤집는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원본과 모사의 질서를 해체한다. 시뮬라크르, 즉 모방의 모방조차도 독립된 힘과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더 이상 중심은 하나가 아니고 복제는 결핍이 아니라 단지 차이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문학은 단순한 모사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를 변주하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 표현할 수 없는 심리적 갈등, 자아와 세계의 괴리 등을 드러내고 모사의 경계를 넘어서는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이 정말로 우리를 구원한다면, 그 구원의 실체는 무엇일까.
데이비드 실즈는 이 질문에 대해 이 책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에서 자신의 경험과 비평을 결합하여 문학이 어떤 의미를 가졌고 오늘날 문학이 어떻게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말한다. 흥미롭게도 이를 위해 ‘온 마음을 다해 믿는 55편의 작품’이 어떻게 자신의 삶과 경계를 넘나들었는지 풀어낸다. 그 목록을 읽다 보면 묘한 친밀감이 생긴다. 이 목록에는 내가 읽은 아우구스티누스, 줄리언 반스, 보르헤스, 존 치버, 에밀 시오랑, 허먼 멜빌, 몽테뉴, 니체, 조지 오웰, 파스칼, 페소아, 제발트, 프루스트 등등의 작가들의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솔직히 말해, 은근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는 걸 고백한다.
하지만 곧 질문이 따라붙는다. 나는 그가 읽은 책을 읽었지만 과연 그가 얻은 것과 같은 사유와 성찰, 구원에 도달했는가. 내게 문학은 여태껏 타인의 눈을 빌려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하는 통로였을 뿐, 삶을 근본적으로 구해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문학은 늘 중요했지만 결정적이었던 적은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저 책을 읽는다는 행위의 즐거움에 빠진 건 아니었을까.
이 지점에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떠오른다. 그곳에는 문학을 실생활에 무용한 장식품쯤으로 여기는 마그누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내가 같이 식사해야 하는 식탁에는 어떤 부류의 인간들이 앉는지 아십니까! 내 오른쪽에는 할레 출신의 마그누스라는 맥주 양조업 자가 앉는데, 그의 콧수염은 마치 건초 다발 같지 뭡니까. ‘나에게 문학 같은 이야기는 말아 주세요!‘ 그가 말합니다. ’ 문학해서 뭐가 나옵니까? 아름다운 품성이 나온다고요! 아름다운 품성으로 내가 뭘 하겠습니까! 나는 실제적인 인간이어서, 실생활에서 아름다운 품성 같은 것은 거의 본 적이 없다오 ‘ 이것이 그가 문학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입니다. 아름다운 품성을 그렇게 말하다니….. 아, 정말 딱한 일입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그의 부인은 날이 갈수록 멍청해지는 동안 단백질을 잃고 있습니다. 정말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요하힘과 한스 카스토르프는 세템브리니의 말에 마치 서로 약 속이라도 한 듯 생각이 같았다. (마의 산. 을유문화사. 287p)
그는 아름다운 품성을 비웃고, 실제적인 인간임을 자처한다. 문학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며 삶에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태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묘하게 공허하다. 문학을 조롱하는 그의 부인은 점점 생기(갈수록 멍청해지는)를 잃어간다. 이를 바라보는 세템브리니의 개탄과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와 사촌 요하힘의 묵묵한 동의는 우연이 아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결과물을 내놓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인간의 내면 역시 서서히 황폐해지지 않을까. 감정은 단순해지고 세계는 도구로만 인식되는데 타인의 고통을 우리는 무슨 수로 이해하겠는가. 문학의 ‘아름다운 품성’은 실생활과 무관한 장식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한 최소한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데이비드 실즈의 책을 읽고 나니 하나의 확신이 생긴다. 문학은 플라톤이 우려했던 조잡한 모사의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 문학은 허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허상을 재구성한다는 것. 우리가 스스로에게 숨겨왔던 진실, 말로 붙잡지 못했던 감정을 문학은 각자의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러므로 문학을 통한 구원은 완성된 해답의 형태가 아니라 과정일 수 있으며 그 과정이 조금 지난하다고 한들 언젠가는 다시 살아볼 수 있겠다는 감각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결국 선택지는 많지 않다. 정신이 온전한 동안 힘이 닿는 데까지 꾸역꾸역 문장을 더듬어 가는 수밖에. 문학이 삶을 구원하는 방식은 언제나 느리고 불확실하지만 그 느린 호흡 속에서 우리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읽는 일은 충분히 계속될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