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레타리아의 밤(자크 랑시에르, 문학동네)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에서는 왜 추운 겨울밤 어린 소녀가 성냥을 팔다가 죽어야 했을까?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풀지 못한 의문이다.
소녀는 당연히 가난한 소녀였을 것이다. 어쩌면 성냥공장의 직공이었는지도 모른다. 동화가 발표된 시기(1834년)의 성냥공장은 성냥 제조 작업의 특성상 성인보다는 어린아이를 주로 고용했다고 한다. 12시간 이상의 노동과 터무니없는 저임금에 혹사당했고 쉽게 해고당했다. 임금으로 성냥을 받기도 했다. 아이들은 임금으로 받은 성냥을 내다 팔아야 했을 것이다.
슬픈 동화로만 알고 있던 이야기의 이면에 이런 비애가 숨겨져 있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폐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며 도시 빈민이 쏟아지던 비참한 시대상의 반영이다. 일종의 잔혹동화다.
소개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밤>(자크 랑시에르, 문학동네)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성냥팔이 소녀의 배경이 된 바로 그 시기, 한없이 고통스러웠을 19세기 초 노동자들에 대해서 쓴 책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박사학위 논문을 위한 자료를 찾다가 1830~1850년대 노동자들이 남긴 다량의 문서들을 발견한다.
뜻밖에도 그가 발견한 것은 고된 노동을 마친 밤, 휴식을 뒤로한 채 치열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철학을 공부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사유하고 철학하는 행위, 즉 여태까지 지식인들만이 향유했던 형식에 저항한 위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밤’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노동자의 정체성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이었다. 그저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받은 임금으로 살아가는 수동적 존재에서 유일한 휴식이었던 밤을 소환하면서까지 주체적인 삶을 이끌어 나가는 ‘특별한 존재’로의 인식 전환이었다. 사실 이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위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밤’의 발굴은 이후 격동의 프랑스 68 혁명 당시 랑시에르가 혁명과 저항의 전선에서 전위(지식인)와 대중(노동자)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스승인 루이 알튀세르와 결별하게 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사실 알튀세르는 랑시에르에 의해 역사의 수면 위로 부상한 노동자의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랑시에르 역시 노동자(대중)는 노동에 전념하고 지식인(전위)은 생각하고 말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기본 질서를 포기하지 않은 알튀세르를 추종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로써 전위와 대중의 ‘역할 분담'이라는 대전제가 뒤엎어지게 된 것이다.
내가 랑시에르에게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본적으로 알튀세르는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지배 구조를 담론으로 접근했다. 이에 반해 랑시에르는 인간의 지적 능력을 포함한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욕구와 자격, 그리고 사유하고 표현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 노동자를 포함하여 누구에게나 있다고 주장한다. 또 이러한 사실을 노동자와 대중이 자각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목소리가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 발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식’의 묵은 사고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그 주체는 바로 노동자 자신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정치란 평등의 실천’이라고 정의한 부분과 같은 맥락이다.
공부하고 사유하는 일은 결코 특정한 계층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라는 것. 주체를 자각한 19세기 초 노동자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철학을 공부하는 모습이 눈물겹게 숭고하다는 것. 책을 덮으며 자각한 위대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