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자렛: 즉흥의 상태> (이기준, 시간의흐름)
어떤 음악은 시간이 지나며 박제되고 어떤 음악은 시간이 지나며 더 깊어진다. 전자는 기록으로 남고 후자는 침묵 속에서 계속 연주된다. 키스 자렛은 분명 후자의 쪽에 조금 더 가깝게 서 있는 이름이다. 현재 그는 무대 위에 설 수 없는 상태지만 그가 남긴 음들은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우리 안에서 끝나지 않는 즉흥을 이어간다.
2018년, 두 차례의 뇌졸중 이후 더 이상 연주가 불가능하다는 그의 고백은 한 시대가 문을 닫는 소리처럼 들렸다. 카네기홀의 마지막 울림 이후 피아노 앞에 앉은 그의 모습은 과거형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작년 여름 그에 관한 책이 나온다는 소식은 단순한 신간 안내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신호처럼 다가왔다.
소개하는 책 <키스 자렛: 즉흥의 상태> (이기준, 시간의흐름)는 평전이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실은 한 인간이 깨어 있기 위해 어떤 삶을 선택했는가에 대한 긴 기록에 가깝다. 뉴욕에서 30년 넘게 키스 자렛을 연구하며 축적된 시간, 직접 만난 사람들의 목소리, 흩어질 뻔한 증언들을 하나의 호흡으로 엮어낸 집요함은 저자 이기준의 개인적인 팬심 차원을 훌쩍 넘는다.
키스 자렛의 음악을 떠올릴 때 나는 곧잘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대비를 호출하곤 한다. 질서와 도취, 구조와 해방. 그러나 그의 연주는 그 둘을 오가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구분이 무의미한 지점에 서 있다. 악보 이전의 침묵, 다음 음을 예측하지 않는 용기, 스스로를 비워내는 집중. 이 책은 그런 음악적 태도가 삶의 태도와 분리되지 않았음을 텍스트와 사진으로 전달한다. 책에서도 언급한 ‘깨어 있음’이라는 그의 말은 추상적 선언이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는 실천이었다.
부록으로 함께한 로베르토 마조티의 사진들은 이 책의 또 다른 문장들이다. 연속 촬영된 연주 장면 속에서 한 인간이 음악 속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다. 표정은 점점 사라지고 몸은 하나의 도구가 되며 마침내 인물과 소리는 구분되지 않는다. 사진이지만 정지되어 있지 않고, 책이지만 소리가 들리는 이유다. 이 이미지들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바라보는 이의 호흡을 느리게 만들면서 출판사 이름 <시간의흐름>처럼 그저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할 뿐이다.
나에게 키스 자렛은 여전히 범접할 수 없는 연주자다. 아니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의 음 하나를 이해하기보다는 그 앞에서 침묵하는 편이 더 정직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이 책 역시 쉽게 펼치지 못했다. 함부로 읽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제야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저자 이기준의 글은 맹목적 숭배가 아니라 존중의 거리에서 쓰였고, <시간의흐름>이라는 출판사는 그 거리를 끝까지 지켜냈기 때문이다.
연주가 끝난 자리에서 남는 것은 소리가 아니라 태도와 존중과 감동 그리고 사유다. <키스 자렛>은 그 태도와 존중과 감동 그리고 사유를 저자 이기준이 기록하고 출판사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낸 책이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름이 다시 낯설어지는 경험. 그 낯섦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한 음악가의 삶을, 그리고 음악 이후의 음악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