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발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다.

by 리디언스

아무도 되고 싶지 않을, 작고 미미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로베르트 발저.


카프카, 헤세, 벤야민 그리고 제발트까지 그를 추앙했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가난했고 끝까지 가난했다. 그리고는 195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아침에 산책을 하다가 차가운 눈밭에서 생을 마쳤다. 그가 작품으로 남긴, 주류에 합류되지 못한 겉도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발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의 삶을 가난이라 부르지 않고서는 그 어떤 수식으로도 그의 삶을 포장하지 못한다.




로베르트 발저의 단편은 임홍배 역으로 나온 <세상의 끝, 문학판>과 배수아 역의 <산책자, 한겨레출판>, 이 두 책으로 읽는데 더러 겹치는 작품들이 있다. 이런 경우 자연스럽게 번역의 차이가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단편 '그라이펜 호수'가 그런 경우다.


'더러 부지런히 풀을 베는 농부들과 마주치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이 전부다' (임홍배 역)


'스케이트를 타는 몇몇 부지런한 사람들을 만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고, 이것이 전부이다' (배수아 역)



임홍배 역 (문학판)



배수아 역 (한겨레출판)



말하자면 '스케이트를 타는 것'과 '풀을 베는 것'의 차이인데 내가 원문을 확인하지 않은 이상 어떤 번역의 완성도가 높은 건지 명확히 평가할 수는 없다. 다만 뒤에 예쁜 꽃들을 유심히 살펴보거나 호수에서 헤엄을 치는 단락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배수아의 스케이팅보다는 임홍배 번역의 풀을 베는 것으로 유추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한다.


또 다른 부분을 언급해 보자면...

‘두 개의 이야기’에서 임홍배가 번역한 ‘말괄량이 삐삐’를 배수아는 ‘붉은 피부의 하녀’로 번역한다.



임홍배 역: 말괄량이 삐삐



배수아 역: 붉은 피부의 하녀



원 작품은 발저가 1902년에 쓴 작품이고 내가 아는 말괄량이 삐삐의 원작은 1940년대에 나왔다. 말괄량이 삐삐라는 번역은 아마도 임홍배 역자의 취향이 드러난 듯하다.


여하튼, 발저의 원문이 어떻든 간에 난 이런 번역의 차이를 좋아한다. 작품의 성격상 고도의 논리적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두 번역 모두 좋다. 작품이 겹치고 미세한 번역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게 오히려 읽는 재미와 흥미를 북돋는다. 어쨌든 둘 다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 아닌가.


철저히 작가의 불행에 기댄 그의 문학은 아이러니하게도 생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동시에 주기도 한다. 발저의 글을 읽을 때면 늘 생기는 어떤 미안함의 이유다.


로베르트 발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다. 나도 물론 발저를 미치도록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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