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뵐과 W.G. 제발트

by 리디언스


이봐 화내지 마, 화내지 말고 모자를 잡아라


책을 읽을 때 아주 사소한 디테일에 집착하는 습관이 있다. 소설을 읽을 때 특히 그렇다. 솔직히 내용을 놓쳤다고 해도 서사의 흐름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들이 태반이다. 하지만 이런 습관 때문에 책 읽기가 종종 중단되곤 하니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예컨대, 하인리히 뵐의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를 읽으며 붙들린 것도 그런 자잘한 것 중 하나였다. 소설 곳곳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봐 화내지 마’라는 게임. 주사위가 굴러가고, 말이 옮겨지고, 딱 소리가 나는 장면들은 지나치게 구체적이다. 서사의 이해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디테일인데도, 그 소음의 정체가 자꾸만 마음을 붙잡는다. 체스를 좋아하던 애인마저 중독될 정도였다니, 그 게임은 단순한 놀이 이상의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앞에서 몇 시간이고 시간을 마취당하듯 흘려보낸다.


‘나는 그런 엄청난 공허와 비슷한 것을 ‘이봐 화내지 마’ 게임이 서너 시간 지속될 때 느끼곤 한다. 주사위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말을 옮기는 소리, 말을 둘 때 나는 딱 소리 등 오로지 소음뿐이다. 나는 심지어 체스를 좋아하는 마리를 이봐 화내지 마. 게임에 중독시켰다. 그 게임은 우리에게는 마취제와 같았다. 우리는 더러 대여섯 시간 동안 연달아 게임을 했다.’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하인리히 뵐, 문학동네 p133)



흥미롭게도 그 게임은 W.G.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에서도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다른 장소, 전혀 다른 무게로 등장한다. 게토에 갇힌 유대인 수용자들이 ‘화내지 말고 모자를 잡아라’라는 게임 도구를 강제 노역으로 생산했다는 내용이다. 놀이를 위해 만들어지는 물건이지만 그 과정에는 놀이와는 정반대의 현실이 배어 있다. 웃음을 전제로 한 문장이 가장 웃음과 거리가 먼 장소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아이러니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이윤 창출을 위해 세워진 공장의 국제 무역 분과나 붕대 제조 공장, 가방 공장, 장신구 제조, 나무 구두창 제조나 소가죽 덧신 생산, 숯 제조 공장, 방앗간, 화내지 말고 모자를 잡아라 같은 보드 게임을 제조하는 일… (아우스터리츠, W.G. 제발트, 을유문화사 p261)



두 게임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미루어 동일하거나 비슷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두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대략 2차 세계대전 전후부터 1960년대까지 독일어권에서 꽤 인기 있었던 것 같다. 주사위를 던지고 말을 옮기고 무엇보다 ‘화내지 마’라는 말이 들어간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 인기 있었던 ‘뱀과 주사위’ 같은 방식의 보드 게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작품 속 게임들은 이름만큼이나 묘하게 닮아 있다. 화내지 말라는 말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명령처럼도 읽힌다. 주사위를 던지고 정해진 칸만큼 이동하며 규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놀이. 어쩌면 그것은 당시의 삶을 축소한 모형이었는지도 모른다. 운에 의해 좌우되고 정해진 틀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으며 화를 내는 순간 패배자가 되는 구조. 이 게임이 독일어권에서 오랫동안 유행했다는 사실은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견디고 있었는지를 은근히 드러낸다.


결국 그렇다면 내가 집착했던 이 사소한 디테일이 사실은 사소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서사의 큰 줄기와 무관해 보이던 게임 하나가 두 작가의 세계를 가늘게 잇는 실처럼 기능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놀이와 노동, 마취와 폭력, 무의미한 반복과 역사적 비극이 그 작은 판 위에 겹쳐져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책을 읽다 멈춘다.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보다 작아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더 오래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어쩌면 독서란 끝까지 가는 일이 아니라 중간중간 멈춰 서서 그런 작은 물건들을, 사소한 이야기들을 오래 바라보고 듣는 일인지도 모른다. 주사위가 굴러가는 소리 같은 의미 없이 들리던 소음 속에서 시대와 인간의 얼굴이 불현듯 떠오르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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