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출근길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한 노인이 낡고 닳은 책 한 권을 손에 쥐고 아주 달게 읽고 계셨다. 책장을 넘기는 손길에는 묵직한 침묵이 배어 있다. 법정 스님의 글을 엮은 책이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모 출판사에서 20여 년 전쯤에 발간한 미니북이다.
세월에 닳아버린 종이의 결, 그리고 노인의 손등에 새겨진 시간의 주름이 서로를 닮아 있다. 얼추 같은 깊이로 자리하고 있다. 이미 이 세상을 떠난 한 수행자의 언어와, 또 다른 시간을 살아온 노인의 삶이 한 페이지 위에서 함께 숨 쉬고 있는 장면이다.
문득, 이 분의 삶을 상상해 본다. 젊은 날에는 가족을 위해 분투했을 것이고, 때로는 희망에 차 있었을 것이며, 또 때로는 쓰라린 좌절을 품고 하루를 견뎌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월이 흘러 여전히 활자의 세계 속에서 지혜를 더듬는 모습은 단순히 앎의 축적을 넘어서는 어떤 형언하기 어려운 살아가는 태도를 보여준다. 지식과 지혜를 구하는 일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세월이 깊어질수록 그 절실함은 더 고요하고 더 절박해지는 듯하다.
독서란 성취와 미완, 목적과 방황을 모두 끌어안은 인간의 숙명적 행위다. 삶의 목적이란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 정진하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노인은 책장을 넘기며 또 하나의 길을 더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다시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물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물음은 청년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노년의 깊이에 이르러서야 가장 절실하고도 가장 순수한 질문으로 되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나 또한 언젠가 저렇게 늙어갈 것이다. 그때 나는 무엇을 붙들고 있을까. 음악일까, 문학일까, 철학일까. 아니면 그저 지나온 생의 기억을 조심스레 들여다보고 있을까.
읽는다는 것은 아직 삶의 문을 닫지 않았다는 신호이고 배우려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끝내 포기하지 않겠다는 고백에 가깝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삶을 사랑하고자 하는 인간의 가장 조용하고도 고귀한 몸짓일 것이다.
한 권의 책에 몸을 기울인 노인의 뒷모습이 말없이 전한다. 나이 들어간다는 건 사라져 가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삶 쪽으로 조금 더 깊이 걸어 들어가는 일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