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하는 자 (토마스 베른하르트, 문학동네

by 리디언스



몰락하는 자 (토마스 베른하르트, 문학동네)


토마스 베른하르트라는 이름 앞에는 늘 모순에 가까운 수식이 따라붙는다. 자신의 조국을 누구보다 증오했으되, 동시에 그 조국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소설가, 어떤 지점에서는 카프카와 비견되는 위대한 작가. 그는 자신의 조국을 지독히도 증오했고 그 조국은 그를 밀어냈지만 그 마찰 속에서 오스트리아 문학은 오히려 가장 날카로운 문장을 얻었다.


1957년 첫 시집을 출간한 이후 자전적 소설 <추위>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통해 베른하르트는 빠르게 평단의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 성취와는 별개로 오스트리아 사회를 향한 그의 혐오와 분노는 점점 더 노골적인 언어를 취한다. 1968년 오스트리아 국가상 수상 연설에서 그는 오스트리아를 “앞으로도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조직”이라 부르고, 국민들을 “빈사 상태에 빠진 인간들”이라 규정한다. 이 연설 이후 그는 ‘둥지를 더럽히는 자’, ‘조국에 침을 뱉는 자’로 불리며 공공연한 적대의 대상이 된다.



그 적대는 단순한 말의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나치 독일 합방 50주년과 빈 부르크테아터 100주년을 계기로 공연된 희곡 <영웅광장>은 오스트리아가 나치의 역사와 어떻게 공모했는지를 정면으로 드러낸 작품이었다. 검열과 공연 금지를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었고 당시 여당 지도자는 수도 빈에서 베른하르트를 추방하고 그의 작품을 금지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 대한 그의 증오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1989년 사망 이틀 전 직접 공증을 마친 유언장에서 정점이자 마지막 구두점을 찍는다. 베른하르트는 이 유언장에서 오스트리아 국경 안에서 자신의 작품이 출판되거나 공연되는 것을 일절 금지시켰던 것이다. 그의 전기 작가 한스 횔러는 이를 ‘사후 문학적 망명’이라 칭송한다. 그만큼 나치에 협력했던 조국에 정면으로 맞섰던 작가였다.


이처럼 지독한 증오의 근원에는 개인사의 어두운 층위가 겹쳐 있다. 그것은 사생아로 태어나 외조부모 밑에서 자란 유년기, 어머니가 꾸린 새로운 가정으로부터 떨어져 보내진 나치 운영 학교에서의 체벌과 감금, 나치 소년단 동급생들에게 당한 폭력이다. 베른하르트 자신이 밝히듯, 그의 문학은 개인적 상처와 국가적 폭력이 뒤엉킨 자리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언제나 세계를 고발하는 동시에 자신을 파괴한다.


<몰락하는 자>는 이러한 베른하르트 문학의 핵심 주제 즉, 죽음과 절망, 자살과 고통과 같은 주제가 응축된 형태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소설의 인물은 단 세 명이다. 1인칭 화자인 ‘나’, 실존 인물이기도 한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그리고 이 작품의 진정한 중심에 놓인 인물 베르트하이머다.


작가 베른하르트 자신처럼 오스트리아를 혐오해 스페인 마드리드에 머물고 있는 화자 ‘나’는 글렌 굴드와 함께 피아노를 공부했던 친구 베르트하이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돌아온다. 친구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사실을 마주한 그는 그 이유를 추적하듯 베르트하이머가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별장과 여관을 찾는다.


처음에 그는 여동생의 부재를 자살의 원인으로 짐작한다. 감사와 구속의 관계로 평생 함께할 것이라 믿었던 여동생이 떠났다는 사실이 베르트하이머를 무너뜨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실은 그보다 더 냉혹하다. 베르트하이머를 죽음으로 밀어 넣은 것은 그가 평생 도달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예술’ 곧 글렌 굴드의 죽음으로 인한 절망과 좌절이었다.


대학 시절, 베르트하이머는 처음으로 글렌 굴드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듣는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은 결코 저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인식이 바로 그의 몰락의 시작이었다. 이상을 인식하는 순간, 삶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무게가 된다.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건 불행한 일이야, 살아 있는 동안 불행은 지속되고 죽음만이 그걸 그치게 할 수 있어.’ (몰락하는 자, 문학동네 p65)


베른하르트가 이 작품을 통해 던지는 문장은 잔인할 만큼 단순하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죽음을 향해 가는 하나의 긴 과정이며, 그런 의미에서 ‘몰락하는 자’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는, 그 몰락을 어떻게 통과하느냐에 있다.


다시 말하면 베르트하이머의 몰락은 감당하지 못한, 이상 앞에서의 처절한 붕괴에 가깝다. 이때의 몰락은 니체 철학에서 말하는 ‘몰락’과는 정반대 편에 있다. 니체의 몰락은 단순한 파멸이 아니다. 위험하지만 몰락 이후로 넘어가기 위한 하강이다. 그러나 베른하르트 세계에서의 몰락은 그 자체 안에 머문다. 이미 닫힌 문 앞에서 주저앉게 되는 독백에 불과하다. 자신이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자리다.


작품 속에서 베르트하이머는 말한다. 글렌 굴드도, 화자인 ‘나’도 언젠가는 자살할 것이라고. 그러나 결과는 다르다. 베르트하이머는 스스로 생을 끊고, 글렌 굴드는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죽으며, ‘나’는 살아남는다. 같은 좌절 앞에서 베르트하이머는 자신을 갉아먹었고, ‘나’는 삶의 성찰을 통해 그 좌절을 사유로 전환한다. 성찰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는 이유일 것이다.


베른하르트의 문체는 화자의 독백과 함께 이 사유를 밀어붙인다.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이 하나의 아리아에서 출발해 서른 개의 변주로 확장되듯, 이 소설 역시 시간과 공간이 겹쳐지고 단락 구분 없이 독백으로 이어진다. 평소 베른하르트는 상투적인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문체 자체를 파괴해야 한다고 했다. 그 결과 그의 문장은 집요하고 장황하며, 독자에게 종종 견디기 어려운 인내를 요구한다. 작품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나는 생각했다”라는 문장은 마치 쉼표처럼 느껴지며 생각이 멈추지 않도록 강요한다.


재밌는 건, 작품 속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소설‘로 언급된다는 점이다.



’물 한 잔을 앞에 놓고 나는 20년 만에 무질의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을 다시 읽어보려 했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설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묘사 따위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파스칼의 작품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때울 수도 없었다. (몰락하는 자, p 60)


이 대목에서 독자는 빙긋이 웃을 수밖에 없다. 로베르트 무질의 작품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에 대해서는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따분함으로 따진다면 파스칼은 그렇다 치더라도 무질이나 베른하르트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이건 베른하르트의 독설일까 아니면 유머일까? 아무튼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작품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불행이다. 현대문학과 독일문학에서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빼놓고 넘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토마스 베른하르트. 그의 문장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나 적어도 몰락의 방향을 정직하게 가리킨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아메리카 (장 보드리야르, 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