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지금 이 순간을 가장 강렬하게 살아내는 음악
19세기 중반, 절정에 이른 낭만주의는 세기말로 갈수록 스스로의 한계를 더욱 밀어붙인다. 후기 낭만주의라 불리는 이 시기, 예술은 더 이상 절제되지 않는다. 잊힌 신화와 운명, 초월적 서사가 다시 호출되고 음악은 문학, 미술을 끌어안고 거대한 스케일로 팽창한다. 바그너와 말러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음악은 감정을 표현하는 수준을 넘어 감정을 압도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려내는 파리가 바로 이 시대의 정점 벨 에포크였다. 이른바 최고의 시대이자 아름다운 시절이다.
‘피아니스트가 발퀴레 기행곡이나 트리스탄 이졸데 서곡을 연주하려고 하면 베르뒤랭 부인은 반대하곤 했는데, 음악이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녀를 지나치게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민음사 11p)
소설 속 베르뒤랭 부인은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지나치게 감동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한다. 이 장면은 후기 낭만주의가 지닌 과잉된 정서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낸다.
하지만 세계 제1차 대전은 이 모든 과잉을 단번에 무너뜨린다. 벨 에포크는 종말을 맞고 후기 낭만주의의 웅장한 서사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된다. 바로 이 단절의 틈에서 전혀 다른 방식의 음악이 조용히 형성되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재즈다.
베르뒤랭 부인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라캉의 말을 겹쳐보면 후기 낭만주의의 음악이 끝없는 충만을 향해 밀려간 주이상스의 궤적이고 재즈는 그와 정반대의 길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재즈는 완전히 채워지지 않고 언제든 멈출 수 있으며 끝내 도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결핍 덕분에 재즈는 계속해서 연주된다. 완결되지 않기에 반복되는 것이다.
재즈는 바그너처럼 세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말러처럼 인간의 운명을 총체적으로 노래하지도 않는다. 거대한 음향이 없어도 되고 신화적인 서사 없이도 재즈는 충분히 인간의 감정을 흔든다.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즉흥적인 반응이며 구조적인 것을 벗어나는 것이다.
재즈는 시간을 설명하지 않는다. 시간을 극복하려 하지도 않는다. 이 시간 감각은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durée)’에 가깝다. 측정 가능한 단위로 쪼개진 시간이 아니라 겹쳐지고 흔들리며 살아 있는 시간이다. 재즈를 가장 재즈답게 하는 즉흥 연주는 미래를 예상하거나 계획하지 않고 과거를 재현하지도 않는다. 재즈에서 시간은 그저 함께 숨 쉬는 흐름일 뿐이다.
재즈는 태생부터 특정 계층의 음악이 아니었다. 노동요와 블루스에서 비롯된 이 음악은 대공황과 전쟁, 인권 운동과 냉전의 시간을 대중과 함께 건너왔다. 지나치게 지적인 체계를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역사와 삶을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한다. 유럽 예술음악이 오랫동안 붙들어온 민족과 운명, 초월의 서사와 달리 재즈는 그런 방식의 거대한 이야기에서는 조금 다른 길로 벗어난 에피소드들이다.
재즈에는 지금 이 순간을 벗어날 여지가 많지 않다. 스윙은 몸을 현재에 머물게 하고 즉흥 연주는 시간을 미리 계산하지 않는다. 싱코페이션은 기교라기보다 살아있는 생기다. 박자를 앞당긴 음 하나에는 아직 오지 않은 순간을 향한 가벼운 기대가 담겨 있다.
재즈는 지금껏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끊임없이 흡수하고 변주하며 스스로를 부정하면서도 살아남았다.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재즈 이전과 이후를 하나의 테제와 안티테제로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언젠가 재즈를 대체할 새로운 진테제의 음악 역시 등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날은 너무 멀어 보인다. 재즈는 여전히 변하고 있고 여전히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숨 쉬듯 살아 있다. 그 점에서 재즈는 지금 이 순간을 가장 강렬하게 살아내는 음악이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층위의 문화와 개성이 존중되는 다양성의 시대다. 재즈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로 변형되고 있는 음악이다. 그러므로 재즈는 장르를 구분하고 정해진 틀에 준거하여 분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내 입맛에 맞는 커피를 하나씩 하나씩 발견하는 재미처럼 재즈의 수많은 스타일을 넘나들며 나만이 좋아하는 연주와 연주자를 찾아 듣는 일은 생각하면 할수록 짜릿한 탐험이자 기쁨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즈를 듣는 행위야말로 현대 사회에 가장 적합한 문화 행위가 아닐까? 키스 자렛의 피아노나 마일즈 데이비스의 트럼펫을 한번 들어보시라.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