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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글 Apr 21. 2023

나의 '은밀한 삶'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이창실 옮김, 1984books>

 재촉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들어갈까, 말까? 카페문을 앞에 두고 고개를 빼꼼히 들어 실내를 들여다보았다. 평일 오전엔 손님이 적고 조용해 혼자 할 일이 있을 땐 종종 들르던 카페였다. 그날은 사정이 달랐다. 아이와 같은 학년이라 아는 사이인 학부모 몇몇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리바리 싸들고 온 책과 노트북의 무게가 묵직해 어서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컸던 걸까, 뒤돌아 걸음을 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몸은 카페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인기척이 들리자 엄마들은 일제히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마음속으로 작은 긴장감을 느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혼자 왔으면 함께 앉아 이야기를 하자고 권했다. 나는 다음을 기약하고 창가의 자리에 홀로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꺼냈다. 이어서 책과 노트, 필통도 꺼냈다. 내 모습을 지켜보던 한 엄마가 바로 내 앞 의자를 살며시 빼고 그 자리에 앉았다. 재택으로 하는 일이 있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대답했다. 노트북은 왜 가지고 다니냐 물었다. 그냥 혼자 놀고 싶어서 가지고 나왔다고 대답했다.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듣던 한 엄마는 지난여름에도 카페에서 혼자 있는 나를 보았는데 너무 집중을 하고 있어 그땐 인사도 못 했다고 말을 거들었다. 온세 엄마, 글 써? 마지막 질문이었다. 나는 그 또한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냥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노트북과 책을 들고는 다니지만 커피와 함께 멍하니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고 손사래를 치며 둘러댔다. 그날은 마감이 하루 이틀정도 남은 글을 쓰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 p.83 그녀는 글을 쓴다. 온갖 색깔의 노트에다, 온갖 피로 만들어진 잉크로. 글은 밤에 쓰는데,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 장을 보고, 아이를 씻기고, 아이의 학과 공부를 돌봐준 뒤이다. 그녀는 저녁상을 치운 뒤 같은 식탁에서 글을 쓴다. 밤늦도록 언어 속에 머무른다. 아이가 깜박 잠이 들거나 놀이에 빠진 사이, 그녀가 먹이는 이들이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 순간에 글을 쓴다. 이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그녀 자신이 되어 있는 순간 그녀는 홀로 종이 앞에 앉는다. 영원 앞에 나와 앉은 가난한 여자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얼어붙은 그들의 집에서 그렇게 글을 쓴다. 그들의 은밀한 삶 속에 웅크리고 앉아, 그렇게 쓴 글들은 대부분 출간되지 않는다. ”


 나도 글을 썼다. 어느 날 갑자기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 건 아니었지만, 책을 읽는 시간이 길어지자 자연스럽게 커진 마음을 따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필사, 그다음엔 짧은 단상, 긴 서평 그렇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따라 쓰다 조금씩 내 이야기를 내어놓게 되었다. 아직은 두 아이를 돌보고, 가정을 살피는 일이 우선이긴 하지만 읽고 쓰는 일은 어느새 내 일상에서 가장 유의미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이 마음을 숨기고 싶었다. 숨기고 싶다기보다는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는 마음에 가까운 것 같다. 누군가 이유를 묻는다면 글쎄.. 아직도 모르겠다. 


 <작은 파티 드레스>를 읽었다.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지는 꽤 오래되었다. 글방 모임을 갓 시작했던 때, 일산의 한 작은 동네책방의 전면 책장에서 이 책을 처음 만났다. 표지가 참 예쁘다는 생각만 하던 중 본 모임이 시작되었다. 마침 글방 선생님께서 모임 중반 이 책의 한 챕터인 '숨겨진 삶'을 읽어주셨다. 당장 이 책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아껴두고 싶었다. 얼마 후 친구와 산책을 했다. 길을 걷다 만난 카페 겸 책방에 들어섰다. 친구와 책을 한 권씩 사기로 하고 책방을 둘러보았다. 보뱅의 책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옅은 분홍 표지의 이 책을 오늘은 사야겠어, 하고 마음을 먹고 바로 꺼냈다가 이내 내려놓고 옆에 있는 다른 책을 들었다. 

 나에겐 책을 대하는 두 종류의 마음이 있다. 뒷 이야기가 궁금해 손을 놓지 못하고 시시때때로 틈이 날 때마다 어떻게든 꺼내 읽는 책, 그리고 표지만 몇 달을 바라보고 책장을 열지도 못하는 책이 있다. 물론 후자에는 자꾸 순위가 밀려가게 된 책들이 대부분 자리하고 있지만, 의 경우는 다르다. 한 글자, 한 문장씩 읽어 나가는 게 아까울 것 같아 읽지 못했다. 마치 독서 버킷 리스트처럼 꼭 읽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때 과감하게(?) 책장을 펼치겠다고 마음먹었던 책이다. 


 막상 읽기 시작하자 조금 당황했다. 작가의 언어를, 문장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처음엔 아주 천천히 읽었다. 밑줄도 인덱스도 들지 않고 그냥 글만 따라갔다. 재독을 시작하자 그제야 연필과 인덱스를 들 수 있었다. 마음에 닿는 문장마다 밑줄을 그었다. 주로 독서, 글쓰기에 대한 짤막한 문장들이었다. 두 번쯤 읽고 나니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책 한 권은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 안에서 몇 문장만 마음에 사무친다면 그걸로 충분한 게 아닐까.


 어떤 계기가 생길 때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다짐을 이야기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다짐은 별 다른 게 없었다. 그동안 해 오던 일들을 계속 열심히 하기. 어쩐지 나는 혼자 하는 다짐에서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자꾸 숨고 싶은 사람. 그런 내가 문득 슬퍼져 다짐을 바꿔 보았다. '하고 싶은 건 하고 싶다고 말하기, 그리고 해 보기!'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도 솔직한 표현은 아니다. 진심은 여기에 있다. 

'쓰고 싶은 건 쓰고 싶다 말하기, 그리고 써 보기.'


 나는 이제 나만의 '은밀한 삶'을 더 사랑할 것이다. 흰 여백 안에서 깜빡이는 커서가 내 마음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인다. 이 안에서 나는 가장 자유롭다는 걸 조금씩 쓰면서 알아가고 있다. '더 많이 읽을수록 아는 건 점점 적어진다.'는 작가의 말을 반대로 빌려보고 싶다. 


'더 많이 쓸수록 쓸 수 있는 건 점점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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