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통의 글 Aug 22. 2023

조각 여름

이건 나만의 여름 기억법

 #여름 1

 “어? 이상하네요. 당연히 안정적일 줄 알았는데..”     

 의사 선생님께선 모니터 화면과 아이를 차례로 바라보더니 아이의 윗옷 속에 손을 넣고 양쪽 가슴을 번갈아 만져보았다. 봄 까지도 멀쩡했던 아이의 오른쪽 가슴에 다시 멍울이 잡히기 시작했다. 호르몬 억제 치료로 한동안 성장이 멈춰 주사 용량을 조절해야 할지 한두 달 경과를 지켜보기로 한 상태였다. 지난달에 비해 0.5cm가 자란 아이, 오히려 체중은 줄었고 성호르몬 수치가 두 배나 뛰었다. 2차 성징이 곧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신호다. 평균적인 월경 첫 시작 시기는 13세, 아이는 10살이 되던 지난해 성조숙증 진단을 받았고 4주에 한 번씩 호르몬 억제 주사 치료를 받고 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내년 여름까지만이라도 잘 버텨보자고 말했다. 그래봤자 12살, 평균 연령보다 1년이나 이른 시기다.     


 #여름 2

 둘째 아이의 담임 선생님께서 올여름까지만 출근을 하고 퇴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초여름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정식 공지가 나가기 전까진 다른 학부모에겐 알리지 않고 나만 알고 있어야 했다. 재작년에 담임을 맡아 주셨고, 올해가 두 번째 해였으니 햇수로는 1년 반을 함께한 선생님이셨다. 속정은 깊지만 겉으로 내색을 비추지 못하고 곁을 내어 주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아이가 유일하게 마음 편히 마주했던 선생님이기도 했다. 지난 금요일 오후, 담임 선생님과의 퇴사가 공식화되었다.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그동안 비밀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아쉬움과 미안한 마음뿐이라며 죄송하다는 메시지에 괜히 울컥. 어린이집 선생님이기 이전에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인 담임 선생님은 급격한 체력 저하와 건강 문제로 체중이 38kg까지 빠졌다고 한다. 

 어느덧 8월 중순, 담임 선생님과의 마지막 여름이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여름 3

 이번 여름, 글쓰기 플랫폼 중 하나인 브런치(브런치 스토리)의 운영 방식이 바뀌었다. ‘응원하기’라는 기능이 추가된 것. 이 ‘응원하기’는 마음이 아닌 ‘돈’으로 보내는 응원인데, 브런치에 속해 있는 모든 작가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체 기준에 따라 ‘응원’을 받을 수 있는 작가와 그렇지 않은 작가로 분류가 된다고 한다. '돈'으로 ‘응원하기’ 기능이야 나와는 별개의 일이므로 별생각이 없었는데 문제는 그다음, 작가들에게 파란 딱지를 하나씩 붙여주기 시작한 것이 나는 꽤 불만이었다. 이 또한 브런치의 기준에 따라 에세이, 가족, 여행, 독서 등등 작가의 글을 토대로 카테고리를 분류를 한 듯은 했다만.

 이 사람, 저 사람 부지런히 프로필을 클릭했다. 누군가에겐 붙고 누군가에겐 붙지 않은 그 파란 딱지. 물론 나에겐 어떤 딱지도 붙지 않았다.


 #여름 4

 폭염 뒤 폭우, 그리고 다시 폭염의 반복이었던 여름. 해가 지는 순간까지 깊숙하게 파고드는 빛이 좋아 남서향의 집을 택했건만 꼭대기층의 더위는 그동안의 여름들과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지은 지 20년이 지난 오래된 집에서의 첫여름, 폭우가 오는 날엔 혹시 어디서 비가 새는 건 아닐지 수시로 천장만 바라보았다. 아무 일 없이 비가 그치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여름 5

 그렇게 긴 여름 방학도 아니었건만 아이들의 방학이 끝나감과 동시에 여름도 막바지에 이르러 그런지 한번 주저앉은 몸을 세우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글방에서의 지난 과제 수정을 마치고 노트북 한 번 열지 않고 거의 열흘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쓰는 건 물론이고 읽는 일도 거의 하지 않고 ‘여름’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두 권의 소설만 간신히 읽어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에 멍하니 누워있기 일쑤,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여름도 있기 마련이니까.       


 #여름 6

 무사히 방학을 마친 기념으로 큰 아이에게 점심 메뉴를 정해보라고 하자 아이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마라탕!’을 외쳤다. ‘그놈의 마라탕’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함께 먹어보기로 했다. 아이와 둘이 선풍기 앞에 마주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맵고 짜고 자극적인 마라탕 한 그릇을 비워냈다. 다음 날, 아이는 학교에 갔다. 아이들을 모두 보내고 오랜만에 숲길을 걸었다. 아이의 하교 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오니 아이의 방에선 아이와 친구들의 대화 소리와 함께 ‘우우우우~’ 뉴진스의 디토가 흘러나왔다. 아이들에게 기척을 하고 간식을 넣어주었다. 문득 다시 노트북을 열고 싶어졌다.   


#이 글은 제가 참여하고 있는 계절글방, 미루글방의 '여름' 마지막 글 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디에나 열매는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