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속 인생

엄마의 아픔과 함께였으나 함께해주지 못했다.

by 꾸준한거북


엄마를 많이 고통스럽게 했던 아빠와

헤어짐마저 참 쉽지 않게 마무리 지어야 했던

우리 엄마는 그 시절 7살 딸을 혼자 키우기엔 세상의 시선과 외가 식구들의 걱정,

그리고 경제적 부담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던

5남매 중의 장녀였고

유교적인 사상이 강했던 나의 외할아버지를 실망시킬 수 없어 재혼을 하셨다.

물론, 귀한 딸인 나를 내 생물학적 아버지에게 보내고 싶지도 않았기에 나를 키워내려면 재혼을 '해야만 했던'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와는 성이 다른 '박'씨 성을 지닌 새아버지와 함께 등본상 '동거인'으로

15년을 함께 가족으로 살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결혼 후,

내 가족의 주민등록등본을

일부러 떼서 보곤 한다.

그걸 보고 있으면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서러움과 행복감이

동시에 올라온다.

그래도 종종 보고 싶은 걸 보면...

행복감이 더 크긴 한가 싶다.


성이 다른 아버지와 한가족으로 산다는 것은

나에 대한 새아버지의 마음이

애틋했고 그렇지 않고를 떠나서

그저 그 현실만으로도

충분히, 상처였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어른들의 선택 속에서 무조건 끌어안아야만 하는 상처.




매 해,

학년이 바뀔 때마다 학교생활기록부에

가족 이름을 써서 내야 하는 게

몸서리치게 싫었다.

친구들이 보기라도 할까 봐

꼭꼭 숨겼다가 뒤늦게 제출하곤 했던

죄 없는 아이의 '죄 많은' 기록부.

내 밑으로 8살 아래 동생이 태어날 때에도

동생 성을 나와 같은 '김'씨로 지으면 안 되냐고 엄마한테 떼를 부릴 정도였으니까.

내 동생은 절대로 '김'씨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정말로 몰랐을까?

아니면,

이 무소속의 마음 좀 알아달라는

어긋난 몸부림이었을까.


그런데 등본상 무소속으로 살면서

더 불행했던 것은 엄마의 아픔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한 번의 이혼을 경험으로 재혼하기까지

엄마가 고통을 씻어낼 수 있는 방법은

술에 대한 의존이었는데

1년 2년 5년이 지나면서...

엄마가 술을 찾는 건지,

술이 엄마를 찾는 건지

분간하기 힘든 나날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어린 동생과 나는 하교 후 소파 밑이나 찬장에 숨겨진 소주병을 찾아내는 게 일이었고,

반 정도 남은 소주병에는 어린 마음에

엄마가 조금이라도 덜 취하지 않을까 싶어서

물을 희석시켜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두곤 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 엄마의 눈빛이 생기 있고 주방에서 분주하게 저녁 준비라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하교 후, 현관문을 열었을 때

엄마가 소파 옆 바닥에 시들어버린 채

누워있다가 토하다가를 반복하면서

일상의 눈빛을 회복하기까지의 시간이

그 당시엔 꽤 길게 느껴졌고

내 속에는

'엄마가 차라리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라는 생각이 자리 잡음과 동시에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분노, 죄책감이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술만 아니면

정갈하고 차분하고 똑 부러지는

내 엄마의 원래 모습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리고 엄마 또한 술에서부터

너무나도 벗어나고 싶어서 죽을 힘을 다하셨고

그 과정에서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기를 반복했기에

엄마를 믿고 실망하다가도

또 믿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난 엄마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 나이는 아니었음에도, 그 무언가로 엄마를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아직도 나를 옥죄고 있다.

내 동생은 어린 나이에도 숙취에 깬 엄마에게

뭐든 사다 먹였으니까.

어느 날 내게 동생이 그랬다.

그때 어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거였다고. 동네 가까운 분식집에서 떡볶이라도 사다 엄마의 빈 속에 무언가를 넣어주는 거.

안 그러면 엄마가 죽을까 봐 무서웠단다.

그런 동생에게 의지했던 나다.

아니, 떠넘겼던 나다.

엄마가 미치도록 불쌍하면서도 미웠기에

무언가 장녀로서 옳은 행동은 하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어른들의 기대에

'어긋나게'반응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외갓집 식구들 말처럼 나는

"지애비 닮아서 싹수가 없는 계집아이 "였기 때문이다.

그 말이 나를 그런 아이로 빚어냈다.

그런 말을 들으며 성장해서인지

실제로도 엄마에게

끝까지 싹수없고 인정머리 없는 계집아이로

남겨진 것만 같다.


"언니! 엄마가 숨을 안 쉬어!" 일을 하고 있던 20대 어느 겨울에 동생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집으로 달려갔는데-

엄마는 동생의 말대로 숨을 쉬지 못한 채 쓰러져 있었다. 아래층에 사는 아저씨께 집에 좀 올라가서 봐주십사 부탁을 하고 집에 가는 길에 119에 신고를 했던 것 같다.


사실 그날의 기억을 꺼내기가 내겐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일하던 도중 동생이 처음 전화를 걸어왔을 때는 "엄마가 이상해. 기운이 없어 보여" 였기에,

나는 "술에서 깨기 전에는

원래 엄마가 그런 증상 보이잖아. 괜찮아"하며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끊어버렸고

두 번째 전화에서 심각성을 느껴

집으로 달려갔던 거였기에 엄마의 심각한 상태와 동생의 두려움을 모른 채 방관했다는 자책감에 매우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응급실에 실려간 엄마는

끝내 깨어나지 못하셨다.

나를 더 죄책의 수렁으로 밀어 넣었던 기억은,

어린 무모함에 전 날 친구들과 늦도록 노느라 피곤함에 절어 위아래로 피를 토해내며

고통 속에서 생명줄을 부여잡고 있는

엄마 곁을 지키지 못하고 자느라 정신없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결국 다음 날 새벽 돌아가셨다.

엄마의 영정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고 정말 이렇다 할 슬픔조차 크게 느끼지 못한 채 영안실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

그때의 그 슬픔이란.

슬픔? 슬픔이라고 표현하자니 너무 억울하다. 슬픔 그 이상, 고통도 무엇도 아닌 그 커다란 상실의 무게를 20대의 젊은 나는 견뎌낼 수 없었다. 살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엄마를 죽게만든 건 나'

라는 죄책감이라도 간직해야

내가 덜 나쁜 딸로 남을 것 같아서-


그렇게 편안한 죄책감에 익숙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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