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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준한거북 May 12. 2023

84년생 엄마, 내 친구

전화조차 원하는 시간대에 할 수 없는 육아동지, 내 오랜 친구에게서 오랫만에 전화가 왔다. 18개월된 막내아들이 하도 안자서 유모차에 태워 장에 나왔다며.

-밥은 먹은거야?

-아니, 밥이 뭐야?난 지금 수다가 더 고파.


20대 후반, 새 차를 뽑은 기념으로 양평 두물머리로 드라이브를 가던 날, 그녀가 좋아하는 버벌진트의 노래를 선곡해주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런 나를 보며 넌 "웬만한 남친보다 낫다 증말" 하곤 했었지.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친구'에게 육아의 고됨을 털어놓고 싶었을 터.

-엄마랑 가까운 데로 이사오면 도움 좀 받을 쭐 알았는데 착각이었지 뭐야.

-왜 어느 정도길래 그래

-우리 아들 좀 봐달라고 하면 한 시간도 안되서 설거지 하는게 더 편하다며 주방으로 내빼질 않나, 우리 집에 저녁쯔음 애 봐주러 온대놓고는 남동생이랑 저녁 먹을꺼 다먹구 8시넘어서야 온다고 하질 않나. 아우 그럴꺼면 오지 말라구 했어.

-흐흐흐흐흐흐흐흐흐 너희 엄마도 전업주부가 아니셨으니 종일 애기 보려면 힘드실테지. 익숙지 않으시겠지. 그 시간이.

-그것도 그렇고, 나 자신보다 손주가 더 귀하고 그런게 아닌 이상 힘들면 걍 나 몰라라 하게되나봐~

 

예전엔 친구가 친정 엄마라는 단어만 꺼내도 부러웠는데, 이젠 그런 감정이 없나보다. 나의 육아와 가사를 온전히 도와주는 그런 친정엄마라면 부러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친구의 친정엄마는 딸의 육아에서 살짝 발만 담궜다 뺐다 하시니 조금 우습기도 하고 친구가 안쓰럽기도 하면서 내 안에 시기하는 마음이 올라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친정엄마는 도우미이모라는 정의마저 내려지려고 하는 참이다. 엄마란 존재가 그렇게만 귀결되면 너무 슬픈 일인데. 친청엄마가 없는 나는 엄마가 나를 도와주지 않아도 있어만 줘도 참 좋을텐데 하면서도 실은 도움의 단계까지 이르러야 엄마를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_슬프다.


친정엄마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된 수다는 9살난 딸이 새벽1시가 되도록 잠을 안잔다는 이야기로 넘어갔다. 얘를 도대체 어찌해야 하냐며, 집에 오면 티비 보고 게임하고 슬라임만 해대니 잠이 쉬이 오겠냐고 투덜댄다. 그래, 그러니까 애 데리고 산이라도 타라고 훈수를 뒀다. 아니면 18개월 된 아들데리고 딸래미 케어하기는 힘들테니 그냥 공원에 나가 돗자리 깔고 거기서 슬라임이든 뭐든 하게 하라고, 뭐를 하든지간에 실내에 있는 것보단 바깥공기를 쐬는게 잠 잘자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너른 공간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그 공기, 바람, 흙 냄새, 지나가는 사람들 속의 나를 느껴보면서 약간의 긴장감도 누리고 그러다가 앉아있는게 지겨우면 설렁설렁 걸어다니며 꽃 구경이라도 하겠지. 그러니 오늘부터 당장 돗자리 깔라고 했다. 내 육아, 니 육아 방식이 다른데 괜한 훈수 두면 친구가 혹시나 상처라도 받을까싶어 끝에 '그래야 니가 편하니까~"라는 말을 덧붙이고.


내가 우리 애들 데리고 가서 너네 애들이랑 놀게끔하고 너 좀 쉬게해주면 참 좋은데 아쉬울 따름이라 했더니 정말 네가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을 전한다. 간절하다며. 오늘 점심도 치킨 3조각을 떼우고 나왔다는 친구에게 나는 건강한 식단 조절하면서 다이어트 중이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럼 웬지 자신의 처지를 더 처량하게 여길까봐. 그래서 친구인가보다. 나 잘났다고 떠들어대지 않고 너 다칠까봐 나를 드러내지 않아서.


-그래도 18개월된 아들 마냥 귀엽지?

-응 귀엽지, 귀여운데...

-크크크크크 넌 꼭 귀여운'데'로 끝나더라?

-그러게 왜 그럴까?하하하

낮잠을 안자니 유모차에 태워 겨우 재우고 집에 들어가면 유모차를 현관에 그대로 세워두었다가 (자리에 눕히면 깨니까) 딸 학교 마치는 시간에 그 유모차 그대로 끌고나가야만 할 정도로 자기 시간이 안나는 내 친구, 그리고 그 상황이 너무나도 이해가 되서 같이 눈물 날 정도로 웃어제끼는 애 셋 엄마인 나. 친구는 아직도 그런 말을 한다.

 -네가 애 셋을 낳은게 아직도 안믿겨

-응 나도 네가 안믿는거 느껴.흐흐흐..그런데 내가 20대때 많이 외로웠잖아. 가족의 상실로 너무 많이 힘들었어서 그런지 지금 내 존재를 드러내주는 얘네가 있어서 순간순간 힘들긴해도 전반적으로는 꽉 찬 느낌, 만족감...아마 행복한가봐. 그래서 넷째를 낳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거지.

-그래, 그렇지.


전화를 끊고 카톡메세지로 너와 수다 떨 수 있어서 힐링이 되었고 스트레스 해소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 너무 좋다는 내 친구. 내가 너에게 그런 존재일 수 있음이 참 감사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친구의 유모차를 대신 밀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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