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다와 잘한다의 거리는 얼마쯤 일까? 이 둘이 나란히 걷는 일은 없을까?
없겠지? 불가능하겠지?
착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이다.
일을 할 때 상냥하고 마음이 고우면 십중팔구 호구로 낙인찍힌다.
그래서 일을 잘하는 것과 마음이 착한 것과는 반비례 관계가 된다.
마음이 착하면 일의 진척을 위한 모진 소리가 쉽지 않다.
상냥하게 남을 배려하다 내 몫을 못 챙기는 경우는 허다하고,
그렇게 물렀다가 눈 뜨고 코 베이는 경우는 숱하게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참 나쁘게도 어릴 때부터 착하다를 칭찬으로 듣고 자라온 세대다.
보면 요즘 친구들은 자기 것 알아서 잘 챙기기도 하고 선도 잘 긋는다.
아니다. 굳이 우리라고 하지 말자. '나는'으로 바꿔야겠다
내 또래의 착하지 않음을 추구하는 이들, 착함을 1도 갖지 않은 사람들,
착함을 이미 버려버린 사람들을 나는 많이 봤다.
어쨌든. 거기에 내가 거쳐온 아르바이트와 일들이 지극한 서비스 업종이다 보니
친절은 그냥 내 기본값으로 박제되어 버렸다.
타인에게 내가 먼저 까칠하게 굴일이 없는 을의 삶으로 오십여 년을 살았다.
그러니 상냥한 나는, 육식동물들이 차고 넘치는 이 정글에서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다 안 잡혀 먹히고 십 이년 근속자가 된 걸 보면 나는 잡식 정도로 진화한 것 같다.
이 진화는 끊임없는 학습으로 이뤄졌다.
내게 눈물 콧물 쏙 뱄던 사람들은 모두 내 가치관을 전환시킨 대스승이었으며
간혹 따뜻하고도 올바른 코칭으로 나를 북돋아 주신 분들이 있었고
함께 맛있는 것으로 화를 삭여준 이들이 있어서였다.
이 시간의 학습으로 착하다 말고 선하다에 중심을 두려고 애쓰고 있다.
잘 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착하다와 잘한다의 거리만큼이나 착하다와 선하다의 거리도 결코 가깝지 않다.
선하다에는 더 많은 책임과 능력이 들어있는 말이라 그렇다.
세상에는 그냥 나쁜 사람들이 있다.
이유를 찾으면 안 된다.
마샤 스튜어트는 우리가 만나는 스무 명 중 네댓은 소시오패스라고 했다.
이걸 더 일찍 알았으면 달라졌을까 싶지만. 저 사람이 왜 그럴까는 아무도 모른다.
왜 그런 저 사람도 자기가 왜 그러는지 모른다.
그럴듯한 이유를 자기가 갖다 붙일 뿐.
그냥 애초에 처음부터 나쁜 사람들이 있다.
그걸 인정하고 나면 깔끔해진다.
친절을 베풀어도 될 사람, 도와줘도 괜찮을 사람 구분이 나름 명확해진다.
나는 애초에 그 기준, 바운더리가 불분명한 사람이었다.
보통은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부터 학습하거나 20대 사회생활을 하며 기준을 만들어 가는데
나는 그 과정이 생략됐다.
그러고 30대 중반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모든 문제에 한꺼번에 직면한 거다.
늦게 배워서 좋은 점은 현타는 힘들게 오지만 그만큼 학습이해도가 높다는 점이다.
단점은 압축적으로 배우다 보니 의외로 상처가 깊이 박히고
나이 먹고 뭐 했나 하는 자기혐오에 쉽게 시달린다는 점.
어쨌든 월요일 아침부터 여러 방면으로 나를 타격하는 상사가 만기친람의 의지로 신경질이다.
그러다 깨닫는다.
지랄도 새로운 지랄을 보는 편이 낫다.
패턴을 아니까 이해된다가 아니라 지긋지긋하다가 된다.
저 통제욕구가 나날이 진화하는구나 싶어서 어쩜 넌 개선이 1도 안 됐냐까지 여러 생각들이 오간다.
자기도 불안해서 저러는 거란 연민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 정도 되면 빨리 헤어지고 다시 안 보는 편이 낫다.
내게 나쁘게 한다고 해서 인성이 정말로 나쁜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인성이, 나쁘다.
그래서 다시는 안 만나야겠다고 하는 거다.
간혹 그 시기가 그래서 서로 가장 밑바닥이 면이 나와서 부딪게 되는 경우가 있다.
호시절에 만나서 일해보면 괜찮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처럼 세 번 만나서 같이 일했는데 매번 나쁜 사람이다라는 인식이 점점 더 강해지는 건 구제불능이다.
이걸 다 겪고보니 이제 첫 번째 나빴던 사람들은 되도록 안 만나려고 한다.
인사발령이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런 모험을 자처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거다.
착하고 만능보다, 까칠하고 내 일이라도 잘하는 게 낫다.
회사에서는 친절 말고 최소의 예의만 있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