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이력

실패도 쌓이면 성공이라는 걸

by 미세스앤

파리올림픽이 시작됐다.

애초에 스포츠는 잘 모르기도 하고 재미있어하지도 않는지라 별 관심이 없어도 계속해서 승패 소식이 들린다.

그중 내 유일한 관심은 셀린느 디옹의 사랑의 찬가였다.

희귀병에도 지지 않는 패배 없는 위대함이겠으나, 노래를 듣고 내가 한 생각은 가수가 아니라 노래에 있었다.

사랑의 찬가는 무조건 옳다.

들으면 사람 마음을 간질이는 노래가 있고 온몸을 세게 흔들면서 웅장한 심정이 되도록 만드는 노래도 있다. 아무래도 사랑의 찬가는 후자 쪽인 거 같다


무엇에도 지지 않는 사랑의 찬가가 위대함이라면 매번 지는 건 어떨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 것처럼 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다.

책을 봐도 그렇다.

어렵고 힘들고 지난한 삶을 살아왔지만 그들은 굵직한 한 줄, 자기만의 한방을 만든 사람만이 책이라는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에 열광하기 때문이다. 패배의 기록은 열광하지 않는다.

나도 종국엔 이렇게 파멸일 거라는 예상보다는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더 바라니까.


그러나 나는 패배의 이력도 남겨야 한다고 본다.

쓸모없는 일 같지만 패배의 이력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울 힘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패배한 사람도 있으니 지금 내 앞의 패배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일이 아니라며 툴툴 털고 일어나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한다.




나 역시 49년을 사는 동안 성공의 기억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몇 번 안 된다.

내신이 거의 꼴찌에 가까웠으나 입시가 수능으로 바뀐 덕분에 첫해에 1 지망 쓴 대학에 단번에 합격을 했다. (심지어 졸업하지도 못했지만)

남들 결혼할 때(우리 때는 결혼은 서른 이전에 해야 하는 건 줄 알았다)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고(내가 어쩌다 아이를 낳고 이렇게 키웠을까. 나 같은 사람도 양육할 수 있다니. 아니...) 아이가 지금 스무 살이다.

그리고 말단이지만 12년째 회사를 꼬박꼬박 잘 다니고 있다는 것.

이게 내 삶을 통틀어 손꼽을 수 있는 성공의 기록이다.


내 삶은 숱한 패배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 ‘안됨’의 가장 바닥으로 내려가자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옛날은 네 살? 다섯 살? 그쯤인 것 같다.

엄마에게 흠씬 두들겨 맞으며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던 것.

내가 한 말은 사실이었고 다음에도 또 그런 말들을 할 수 있을 것이었지만 너무 아파서 거짓말하면서 내 성질에 못 이겨 울었다.

초등학교 때는 한 학년에 두 번 전학을 간 적도 있었으며 이사를 어찌나 많이 다녔는지 주민등록 초본은 세 장이나 된다.

전학과 이사가 패배의 기록이 될 수는 없지만 패배의 밑거름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지금도 하루에도 몇 번씩, 아니 매일같이 진다.

식욕에 지고, 탐욕에 지고, 질투에 눈멀고 인정욕구에 목말라하며 살다 보면 퇴근할 때쯤엔 녹초가 된다.

체력에도 지는 갱년기다.


그러나 그렇게 매번 하루에도 몇 번씩 삶의 오만 것들에게 지면서 살다 보니까 깨달은 게 한 가지 있다.

패배는 중요하지 않다.

물론 기분도 더럽고 기운도 빠진다.

하지만 그날 저녁엔 맛있는 걸 먹고 잘 자면 된다.

끼니를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자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하다.

다음날 패배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일상을 살아나갈 힘을 주니까.


바보라서 패배의 기억이 있는 곳으로 출근하는 게 아니다.

어제 못해낸 일을 오늘은 잘할 수도 있고 잘했던 일도 잘 안될 때도 있고 그렇다.

그런 크고 작은 희비에 휘둘리더라도 아침에는 일어나서 출근을 하면 된다.

(물론 무조건 도망쳐야 하는 회사는 제외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십 년 차 이상의 직장인이 되는 거다.


십 년쯤 어떤 일을 계속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능숙한 일잘러가 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대신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무수한 패배들이 패스트리처럼 겹겹이 쌓인다.

그때마다 포기했다면 겹겹의 환상적인 맛, 폐스트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좌절과 실패가 그런 반복이 있어야 한다는 것.

모든 비범함과 탁월함은 무한반복에서 비롯된다는 것.

그게 내가 젊은 시절에는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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