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어나가겠는 더위라며 여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하늘은 높아졌고, 구름은 크고 낮게 지나간다.
공기의 차가움이 마음을 쨍하게 만든다.
가을이라니.
아직도 한낮 온도가 30도에 이르지만 숨길 수 없는 가을이다.
밖에서 점심을 먹고 보니 회사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대로 째고 싶지만 휴가가 없다.
오늘까지 보내야 하는 문서도 있다.
코에 바람이 잔뜩 들어서 이렇게 쉬어버린 날들이 나를 휴가가불자로 만들었다.
어차피 퇴사할 때 이 회사는 휴가 다 쓰고 퇴사해야지 돈으로 안 준다.
그만둘 것이라는 말을 십몇 년째 (이제 햇수를 세는 것도 귀찮다.)하면서도
아직 직장인이다.
당장이라도 그만둘 수 있을 것 같던 회사를 지금도 다니고 있고
심지어 중간에 승진하려고 발버둥 치며 겨우겨우 시험을 통과했다.
잠재적 퇴사자 일 것 같던 나는 말과는 다르게 한 계단 오르려 발버둥 쳤다.
나를 알던 언니들은 그런 내게서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게 됐다.
남편은 퇴사 후 방에 콕 박혀 육 개월을 그러고 있고
아이는 고등학생이고(물론 바로 취업하겠다고 했지만)
우리에겐 무한증식 중인 빚이 있었다.
무기계약직은 10년 차가 되어도 급여가 별 것 없다.
가외수입을 궁리한 끝에 승진시험을 보자는 결론에 이르렀을 뿐.
무기계약직을 선뜻 그만두지 못한 데에는 돈 보다 더한 것이 내 발목을 붙잡아서였다.
글을 쓰는 일은 내 일의 10퍼센트도 안된다.
그 외 나머지, 기자님을 만나고 비용처리를 하고 문서를 기안하고
아침 신문 스크랩 등등의 다른 일들이 90퍼센트다.
일 년에 내가 생산해 낸 보도자료와 기고문, 기획보도 등 글의 개수를 세어보면
50개 이쪽저쪽이다.
내 어릴 적 꿈은 시인이었고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 하는 이 일이 어쩐지 글이 밥이 되는 일 같았다.
돈은 얼마 되지 않고 다른 할 일이 더 많아도
거기서 오는 만족이 슬픔과 힘듦을 압도했다.
회사를 다녀서 좋은 일은 밥벌이라는 것 외에도
삶의 루틴을 제공한다는 큰 장점이 있다.
긴 시간 우울증을 앓았던 내게는 약을 먹으면서도 일상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는
이 루틴이 도움이 됐다.
물론 아침 스크랩하며 만나는 오만가지 사건사고 기사들은 제목만으로도
나를 불안에 떠밀어 넣었지만 이 역시 장점이 단점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가장 큰 단점은 내가 들인 노동력과 정성에 비해 턱없이 낮은 사회적 위치와 급여였다.
이렇게 맨 말단으로는 못해먹겠다며 점집을 전전하며 퇴사를 간 봤지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승진 시험을 준비하라고.
사주, 신점, 타로, 관상. 모두 같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라도 그런 답을 했을 것 같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누군들 이렇게 퇴사를 꿈꾸지 않을까.
매일매일 퇴사하고 싶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회사에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았다.
그래서 이직을 고민하거나 퇴사하고 싶다는 젊은 친구들에게 매번 말한다.
사기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이 회사는 너를 자르지 않는다고.
그러니 힘들 때는 하는 일을 바꾸든, 지역을 바꿔보면 된다고.
아니 그냥 일단 출근만 해서 퇴근 시간까지만 있어도 된다고.
그냥 일단 출근만 하라고.
출근만 하는 건 월급루팡 같겠지만
이렇게 퇴사를 고민하는 너는 일 년 내내 월급루팡인 사람일 수가 없다고.
진짜 월급루팡은 뭔가 타고난 게 있는지 절대로 자기가 먼저 퇴사할 생각을 안 한다.
퇴사는 고난의 순간들을 이겨 나가기 위한 찰나의 꿈같은 것이다.
물론 개인 회사라던지 지금 나와 전혀 다른 환경의 회사를 다니는 이들에게는
이런 말이 적용되지 않는다.
솔직히 하는 일을 바꿀 수도 같이 일하는 사람을 바꿀 수도 없는 곳이라면
퇴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을 때, 더 소진되기 전에 빨리 도망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됐든
그 일은 우리에게 경험이라는 것으로 쌓여 양분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퇴사를 하든, 머물러 있든 이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들지 안 만들지는 내 선택이다.
퇴사하지 못하는 내 처지가 한없이 서글퍼 보이는 날일지라도 어차피 컵케이크를 먹는 이유는 건포도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건포도는 잠시의 희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