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험부터 오십이 코앞인 지금까지 나는 백점을 맞아본 기억이 없다.
그리고 1등의 기억은 딱 한 번뿐이다.
그러니 애초에 매일 백 점 같을 거라고 완벽을 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8,90 점은 되어야지 그러려고 노력해야지 하는 강박은 가지고 있다.
아마도 상위권의 삶을 살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 점인 하루하루를 쌓아 그들의 성공을 이뤄냈을 것이다.
연휴 내내 유튜브 드라마 몰아보기를 여러 편 정주행 하는 중에 간간이 본 쇼츠에는
470만 원 대기업 직원의 성과급 탕진이나 급여 탕진의 내용이 떴다.
직장 다니면서 이직하기까지.
고생한 나를 위해 명품을 사고, 소고기를 먹고, 백화점 팝업스토어에서 지른 것들까지.
그녀의 소비 목록과 내 소비 목록은 ‘고생한 나를 위해서’라는 목적은 같았지만
내용은 달랐다.
급여가 절반인 나는 애초에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털어봤자 다이소이고 손가락 폭풍 주문 이래 봤자 쿠팡의 자실자실한 물건들이다.
애초에 경험치가 다르다.
매번 백 점만 맞던 아이가 88점 맞았다고 엉엉 울면서 집에 가는 것처럼.
잘해봤자 70점인 아이는 58점을 맞아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명품을 경험하지 않은 나는 왜 그 돈을 들여서 애지중지할 물건을 사는지 잘 모른다.
나 같은 사람에게 물건은 쓰고 닳아지라고 있는 거다.
더 젊을 때라면 이 사람은 어떻게 대기업 취업에 이직에 유튜브까지
이렇게 부지런해서 잘 나가는 건가 생각했을지 모른다.
중년인 나는 지금이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치열한 세상인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스무 살을 갓 넘긴 아이가 살 삶을 생각하며 한탄한다.
아이도 역시나 나와 비슷한 삶일 것이다.
삶의 급격한 상승이 이뤄질 확률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가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 취업을 하고 사람들이 다 축하한다고
지방에서는 꽤나 괜찮은 직장이라며 잘 됐다고 말했을 때
나는 엉엉 울었다.
적어도 나는 스무 살에 헛꿈을 꾸며 서울 친구들과 내 옷차림을 비교했다.
아이처럼 스무 살부터 내가 꿀 수 있는 꿈의 한계에 대해 부딪치지는 않았다.
(어쩌면 아이는 전혀 생각 못 했을지 모른다. 그냥 내가 설정한 아이의 한계일 런지도)
알고리즘은 내게 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을까.
애초에 백 점은 없는 삶.
그런데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하기엔 지나고 보니
그 사이 숱한 행복들을 아닌척할 수가 없다.
남들이 쉽게 겪지 않는 고난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됐지만
그럴 때마다 내게는 늘 나를 돕는 이들이 있었고 손 내밀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온전히 부모 손에 달려있던 어린 시절보다는 세상 속에서 살게 된 이후,
좋은 사람보다 나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난 것 같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은 늘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내 삶의 길을 바꿔놓았다.
아이가 몇 점에서 시작했든 이제 우리 부부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상에서 더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기를 바란다.
모든 사람의 삶이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내고 이뤄가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웃음을 만끽하기를 바란다.
한낱 정신승리에 불과하다 비난할지라도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를
나보다는 더 일찍 터득하기를 바란다.
70점이든 50점이든 점수를 매길 수 없는 삶의 의미가 모든 사람의 삶에
제각각의 색과 무늬로 있다는 것을 나보다는 더 일찍 느끼기를 바란다.
알고리즘은 비교를 위해 내게 그녀의 영상을 보여준 것이 아니다.
내가 아이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