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속 십 년이면 나도 회사적 인간

직장인은 휴가도 마이너스?

by 미세스앤

나는 까탈스러운 사람이다.

옆 사람 숨 쉬는 소리, 눈치 없이 받는 전화 답변 내용들,

다른 파트 차장이 자기 파트 직원에게 하는 으스댐.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내 시야와 귀에 걸린다.

남들은 신경 쓰지 않는 것들.

당사자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들.

난 그런 것들이 너무 쉽게, 의도치 않아도 자동으로 보이고 들린다.

그래서 세상엔 온통 싫은 사람 천지다.

신랑님은 내게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 몇이나 되느냐고 묻기도 했다.

글쎄. 기간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24시간 있어도 온전히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은

신랑님과 아이, 이렇게 둘 뿐이며

간간히 만남으로 충분하고 온전하게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은 다섯 명도 안된다.

회사에서 적당히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은 다섯 명보다는 좀 많다.

그러니까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단점을 매직아이처럼 본다. 아니 보인다.

부정적인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나마 내가 꼽은 이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통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장점은 단점을 쉽게 무찌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장점이 단점을 무찌르지 못했으므로 이건 내 탓이 아니다.


이런 사람을 전문적인 용어로 일레인 아론은 'HSP' 초민감자라고 했다.

그냥 들으면 저주받은 초감각정도로 보일 테지만

잘 활용하면 센스만점인 일잘러로 거듭날 수도 있는 축복받은 능력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런 삐뚤어짐으로 어떻게 회사 생활이 가능하겠는가.

그런데 지금 12년 차다.

나도 미쳤다고 생각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월급에 길들여져 버린.

아니, 우리 집 벌이가 좀 괜찮았다면 진작에 그만두고 베짱이 주부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집은 이 적은 급여라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할 줄 아는 것 없는 삼십 대 후반의 주부를 써주는 곳은 거의 없고,

이마저도 이제 내일이면 오십이니 더 못 찾겠지.

신랑님이 집에서 몇 개월간을 쉴 때는 절대 그만 두면 안 되겠구나 하면서 다녔다.

하다 하다 월급을 올리려는 욕심으로 승진시험까지 봤으니

나 같은 사람의 이 정도 노력이면 이 회사에 뼈를 묻는 게 정답이다.

그러나 베짱이의 사력을 다한 고생 끝에 막상 한 계단 올라와 보니 오른 월급은 30만 원.

근데 하는 일은 두 배가 됐다.

하필 그 시기에 사건이 터지고 여기저기서 터진 나는 현타를 세게 맞아

공황장애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일 년이 지나고 나니 일을 좀 줄일 수 있었고 공황장애 약은 끊은 상태다.




십 이 년 차여도 여전히 나는 회사 부적응자 같다.

출근해서 직원들과 이야기하다가도, 하등의 쓸모없는 일을 절차랍시고 하고 있을 때,

아무 말 대잔치를 하고 있는 누구를 보며 당장 집에 가고 싶어 진다.

참고 또 참았지만 (열에 아홉은 집 가고 싶음을 참았다고 생각한다.) 결론은 휴가 가불자다.

일 년에 열 개씩 휴가를 가불 할 수 있는 제도가 없었더라면, 진작 퇴사했겠지.

아니 가족친화경영을 한다면서 30분 단위까지 휴가를 쪼개쓸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준

전전임 사장님께 큰절을 올려야지.


근속 연수가 20년도 넘어 휴가가 넘쳐나는 회사 언니들은

나 회사 그만둘까 봐 사장님이 만들어 준 제도라고 놀렸다.

(사장님이 하찮은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이런 걸 만들어줬다기엔

이 회사 규모는 너무 크다. 전 직원이 6천 명이니까...)


이렇게 나를 집으로 가게 만드는 대부분의 일.

대체 사람은 왜 싫을까? 그냥 보통의 사람인데.

딱히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비인격적인 사람인 건 아니다.

내가 비회사적인간일 뿐.


이런 쓸데없는 감각들을 조절하지 못해서 회사를 그만둔 적도 있다.

자동차보험 사고접수를 받는 콜센터 상담이었는데

아직 아이가 어렸을 때라 하루 네 시간 근무 조건은

다른 어떤 아르바이트보다 강렬하게 좋은 조건이었다.

아르바이트로는 누릴 수 없는 보장들을 함께 누릴 수 있었으니.


면접을 보고, 한 달간 교육을 받고 투입된 지 한 달 만에 그만뒀다.

면접 탈락자, 교육 탈락자가 있었지만 다니다 그만둔 경우는 내가 처음이었다.

주변에서 다들 만류했다.

일도 잘하고 있는데 대체 뭐가 문제냐고.

남들에게 하지 못한 대답.

문제는 팀장이 일에 서툰 어떤 직원을 한 달 내내 피드백하는 것 때문이었다.

난 그 소리를 듣는데 지쳐버렸다.

내게 하는 말이 아님에도 비아냥이 섞인 발언들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그때는 그랬다.

서른 넘었는데도 조직에서 적응하기 위한 나만의 수단이 1도 없었다.

이런 과감각자들(초민감자)이 회사를 다니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필수품들이 있다.

요즘 눈깔이가 끼고 있는 아이팟도 그중 하나다.

혼자 조용히 도망갈 수 있는 공간도 정해두면 좋다.

내가 주로 잘 쓰는 방법은 당장 그 자리를 떠나서 잠깐이라도 밖에 나갔다 오는 것이다.

정말로 5분만 거리를 걸어도 손쉽게 머리가 말끔해진다.

하지만 아는 것과 실천 사이는 멀다.

알고 있지만 내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고

지금처럼 책상 간격이 너무 좁고 한 장소에 사람이 구들구들 모여있는 경우는

거의 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맞다 비상이다.

정말로 정말로 사람이 싫다.


이런 나도 아직 회사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 행운이기도 하다.

내가 하는 일은 남들의 기피 업무이다.

남들은 기자를 만나서 응대할 말도 한마디도 없으며

한 줄의 글도 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덕분에 오래 버틸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기피업무를 오래 하다 보면 부풀려진 평판으로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다.

늙은 입사자의 아직 살아있음은 뭐 그런 이유에서다.

잘나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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