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을 코앞에 둔 나는 자전거를 못 탄다.
어릴 때도 자라서도 자전거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지나고 보니 이건 핑계다.
스무 살이 넘고 나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뭐든 배우면 된다.
배우려고 하면 스승은 저절로 나타난다.
나는 오히려 어른이 되어서는 자전거를 왜 배우느냐며 그런 거 싫어한다는 말로 배우기를 피해왔다.
자전거 탈 줄 모르는 내가 창피했기 때문이다.
탈 줄 모르는 게 창피한 게 아니라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게 창피한 걸 몰라서였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배우면 되겠지만 한 두 번 시도하고 그만뒀다.
두 다리로 부지런히 페달을 밟아야 하는 노력 대신 기름을 태우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젊어서도 지금도 자전거를 못 타는 것은 내 탓이다.
부모는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해야 하고 삶의 기술들을 익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양육한다라는 말을 쓰는 거다.
물론 요즘은 뭐든 잘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우는 것이 대부분의 목적이 됐지만
그렇다고 내 나이가 되어서까지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은 부모를 탓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얼마든지 내게 선택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선택지의 강약이 있을 수는 있지만 선택 비선택은 순전 내 책임이다.
하염없이 부모탓만을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안타까운 것은 뭐든지 일일이 겪어보고 나서야 깨닫는 늦된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걸 사십 줄에야 알았다는 거다.
남편이 자전거를 가르쳐주겠다며 나를 광장으로 끌고 갔을 때,
자꾸만 넘어지는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아무도 나를 관심 있게 보지 않는데도 그랬다.
안장은 너무 좁고 딱딱했다.
내 푹신한 엉덩이로도 커버가 안될 만큼 안장이 뾰족하게 느껴졌다.
엉덩이 아파서 못 타겠다고 했지만 그 역시 핑계다.
아이의 자전거 바지를 좀 빌려 입어도 되고 안장에 푹신한 뭔가를 깔아도 된다.
그냥 시도하고 넘어지고의 반복이 귀찮았고 남의 시선이 신경 쓰였을 뿐이다.
이렇게 어릴 때 호된 결핍을 앓은 사람들은 두 가지로 나뉜다.
부모 탓만 하며 신세한탄이 끊이지 않는 사람과
이제 내가 어른이 됐으니 내가 선택해서 시도해 보겠다로 나아가는 사람.
전자가 과거로 끊임없이 달려가는 사람이라면 후자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도 후자 쪽의 미래형 인간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결핍 많은 사람이 이렇게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단번에 되는 것도 아니고. 과거로 달려가려는 자아를 반대로 밀어내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결핍 없는 사람보다 미래지향형 인간이 되기는 몇 배는 어렵다.
사소한 일에서도 자기 연민이 자동으로 튀어나와 과거를 소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영 안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나처럼 뒤늦게 어렴풋이라도 알고 자기 연민에서 그만 걸어 나오는 순간들이 생기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니 과거로 달려가는 힘이 큰 사람들은 앞으로 한 발짝 걸어 나가기도 힘들다는 걸 알고
내가 한 걸음 나갔을 때 남들보다 몇 배는 더 격렬한 응원을 해줘야 한다.
옆에 그렇게 알아보고 응원해 주는 이가 있으면 훨씬 좋겠지만 없으면 내가 해주면 된다.
가끔은 효과가 없는 것 같아도 자꾸만 내가 나에게 말해주다 보면 꽤 괜찮은 내가 되어 있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자전거를 배울 생각은 없다.
게으른 내 몸뚱이 탓을 하며 나는 운전을 더 공들여해 보거나 더 잘 걸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