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는 마들렌으로 추억을 소환했지만 소환할 맛있는 냄새가 없는 나는
비 냄새에서 외할머니네 뒷마당을 소환했다.
외할머니네는 어린 시절 1차원적인 욕망을 마음껏 드러내도 괜찮은 곳이었다.
쉽게 위험하지 않았고, 사촌 동생과 싸웠더라도 버림받을 일은 없었다.
뒷마당에서 자른 지렁이처럼 그곳에서의 추억은
자연과 꼭 붙어 무한 증식하는 어린아이의 무해한 탐욕 같은 것이었다.
두 살 아래 미연이는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집에서 살았다.
방학 때마다 찾아와 언니 노릇을 하는 내가 미웠을 테지.
외할머니 역시 방학을 보내러 간 나를 곱게 보지 않았다.
"여기 시골 애들은 학교도 야간으로 다니고 공장 다닌다"며
너도 그러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다.
그런 외할머니가 미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작 서른 인 홀로 된 딸에게 딸린 열 살 손녀가
딸에게 붙어 안 떨어지는 혹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반작용으로 나는 지적 허영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핑계다.
굳이 내 지적 허영의 근원을 찾아보니 그런 것까지 핑계가 된다.
그때부터 나는 대학교까지 졸업하겠다고 결심했었다.
진짜 졸업까지는 너무 오래 걸렸지만.
어쨌든 외할머니는 너네 엄마 힘들게 하지 말아라면서 날 선 말들을 방학 내내 했다.
내가 왜 공장을 다녀?
낮에 공장을 다니고 밤에 공부를 한다는 것은 열 살 내가 들어도 힘들어 보였다.
나는 그런 힘든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야간은 고등학교 때나 있는 거였다.
외할머니의 끊임없는 야간학교 타령에
싫다고 소리 지르고 내 멋대로 행동하는 말 안 듣는 손녀일 수 있었던 용기는
외할아버지한테서 나왔던 것 같다.
외할아버지 홍만수 씨는 원래 큰딸을 유독 아꼈다.
그 큰딸의 유일한 딸이 나였으니 나는 그냥도 의기양양했다.
외할아버지는 새벽 4시 반이 되면 일어나
정지 찬장에서 먹다 남은 소주를 열어 한잔 마시고
안방으로 와서 화투로 그날의 운세를 뗐다.
백열등 불빛과 화툿장 부딪는 소리에 나도 매번 그 시간에 깼다.
눈을 뜨면 가시내가 예민해가지고 잠귀도 밝다는 외할머니의 핀잔을 들었다.
외할아버지는 “또 자면 되지, 뭘 그리 잔소리를.. ”하고 말끝을 흐렸지만
외할머니의 긴 잔소리를 단번에 막을 수 있는 위력이었다.
방학 내내 미연이와 나는 싸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싸우는 바람에 외할머니는 화를 내다가 지쳐서
미연이와 내 머리를 같이 묶어놓고 둘이 붙어 앉아있는 벌을 내렸다.
서로 쳐다보며 성질이라도 낼라치면 묶어놓은 머리카락이 아팠다.
미연이는 그곳이 자기 집이라는 이유로 독보적으로 외할머니께 이르기를 시전 했다.
그 와중에도 나를 약 올리려고 나하고 싸우고 난 뒤에만 원기소를 달라고 해서 내 속을 뒤집었다.
내가 없을 때 미연이는 원기소를 먹기 싫어서 늘 외할머니와 실랑이를 했다고 한다.
나만 오면, 나와 이렇게 싸우고 나면
꼭 외할머니께 자발적으로 원기소를 먹겠다고 해서 내 속을 뒤집어 놨다.
큰 이모가 매달 생활비와 함께 보내주는 약이라 이건 미연이 거다.
하면서 외할머니는 그 옆에서 멀뚱멀뚱 구경만 하는 내게 단 한 알도 주지 않았다.
고작 원기소 한알이 어찌나 서운했던지.
하긴 그냥 원기소 먹으라고 했으면 아마 나도 안 먹겠다며 내뺐을 거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맨날 맨날 엄마랑 싸우던 아빠는 갑자기 사라졌고,
엄마는 새벽부터 식당을 나갔고 나는 혼자 학교를 가야만 했다.
내가 학교 가고 나면 어쩐지 아빠가 나를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빠를 기다리며 집에 있느라 자주 무단결석을 했다.
그러다 방학이라고 외할머니집에 갔더니 나만 온통 푸대접을 받는 기분이었다.
원기소를 나만 안 주는 것은 외할머니가 나를 미워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속상할 때 나는 집 뒤뜰에서 나뭇가지로 땅을 파다가 지렁이를 발견했다.
지렁이는 잘라도 잘라도 계속 꿈틀거렸다.
지금은 질색인 기다랗고 흐물거리는 그런 아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다 잔인했다. 잘랐다.
뒷마당은 그늘져, 흙에 물기가 많았다.
비가 온 다음날이면 뒷마당은 질퍽한 땅이 됐다.
무조건 지렁이를 많이 찾아내서 자르던 어느 날은 비가 갑자기 많이 내렸다.
비를 피해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하느님이 지렁이를 살리고 나를 혼내고 싶어서 이렇게 센 비를 내리게 하는 걸까 하는.
툇마루에 앉아서 한참 동안 쏟아지는 비를 보았다.
시원하게 내린 비에 흙이 젖은 냄새가 났다.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하면 그냥 소나기였는데.
그때만 해도 지렁이 자르다 놀란 열두 살에게 비에 젖은 흙냄새는 어쩐지 다정한 냄새 같았다.
지렁이를 자르지 않아도 뭔가를 아프게 하지 않아도
감각이 열리며 마음이 후련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