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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앤 Sep 13. 2024

슬픔자동인지시스템

오늘의 우울은 습도 70%의 날씨 탓도, 날 괴롭게 하는 잔소리 때문도 아니다. 

이건 순전히 호르몬의 문제다. 

갱년기의 시작은 사람마다 다르고 양상도 사람마다 다르다 했지만 

원래도 습도에 취약했던 나는 이번 장마 앞에서 철저하게 무너졌다. 

전기세를 부서 평가 항목에 포함시켜서 에너지 절약으로 금액을 낮추지 못하면 낮은 평가를 받는다. 

일단 상반기 꼴등을 하자 담당자와 부장님은 속이 탔는지 에어컨을 안 틀기 시작했다. 

그럼 뭐 하나 다른 층 부서는 아침부터 퇴근까지 에어컨을 트는데. 

이럴 땐 화가 나야 하지만 이런 회사에 매일 같이 출근해서 앉아 있어야 하는 내 신세를 한탄하며 

사소한 일에도 눈물이 찔끔찔끔 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아주 사소한 문제에 부딪히면 나는 자동으로 고아 모드가 된다. 

세상에 내 편은 하나도 없고 내 삶은 어찌 이리 기구하단 말인가 

불쌍한 것 같으니라고 하면서 질질 짜는 거다. 

내 편이 있고 없고 와 상관없고 그냥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소한 일 앞에서도 나는 자동이다. 

이걸 깨달은 지는 얼마 안 됐다. 

자주 우는 이유가 슬퍼서, 사건이 슬퍼서가 아닌 내 삶이 짠해서라는 이기적인 이유라니.




상담을 하면서 처음 살펴봤던 이야기는 통제력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너무 자주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속상해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고 울음의 횟수가 좀 줄었다. 

그다음엔 자기 연민에 대해 알아차리게 됐다. 

그전까지 난 감정이 너무 풍부한 사람이라서 잘 웃고 잘 운다고 착각했었다. 

자기 연민이 발동돼서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줄 몰랐다. 

그 뒤로 눈물이 쏟아지는, 아니 쏟아내는 일은 급격히 줄었다. 

꼭 나를 그렇게 불쌍해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였고, 무엇보다 나라서 생긴 일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담받기 전에는 그걸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상담선생님의 코칭은 그렇게 서서히 나를 성장시켰던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다 인식을 하고 나서도 몸이 자동으로 고아 모드로 넘어갈 때가 있다. 

상담선생님께 다 배우고 난 뒤에도, 내가 그런 사람이고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을 다 알고 난 후에도 

내 몸과 마음은 오래 밴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가장 먼저 소환하는 시스템이다.


잘 들여다보니 슬픔자동인지시스템이 내장되어 있는 내 몸은 

육체적 힘듦이나 소비의 욕망에 들끓을 때 자동 발현됐다. 

그러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것을 먹으며 

간간히 고민을 섞은 시시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시끌벅적하게 하면서 잠재워진다. 

가끔은 이유 없는 시간 휴가를 내고 집에 들어앉아 설탕이와 내외하며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다보니 조용해질 때도 있다. 

시간이 지금보다 절반의 속도로 갔으면 좋겠는 순간들. 

그 순간들이 내 슬픔자동인지시스템을 무력화시킨다.


김경일 교수는 그런 순간들을 내가 행복해지는 작고 사소한 순간들이라고 했다. 

그런 순간들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안좋은 순간들을 전환시킬 방법들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라며 부지런히 그런 순간들을 

잊지말고 메모해 두고 써먹으라고 했다. 

그러나 그게 매번 가능하거나 매번 통하면 좋겠지만 

안될 때가 있다. 

그래서 새로운 슬픔이 오는 것 같으면 좀 자세히 들여다 봐야 한다. 

그러다하는 생각. 

기쁨자동인시스템 이런건 없나? 난 유쾌한 사람이 아니라 없나? 

아니네. 자동으로 나를 신나 버리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운전하면서 듣는 김현철의 Drive(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이건 시시때때로 바뀐다), 

누군가 내게 준 작은 선물, 알라딘에서 만나는 내가 찾던 책, 설탕이의 뽀뽀. 

그런 것들이 또 나를 신나 버리게도 하네. 

자동인지시스템은 둘 다 있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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