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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앤 Sep 25. 2024

영이씨네 꿀단지

진짜 어른이 되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첫 여성대통령이었던 때, 우리 동네 낡은 시장은 혁신의 아이콘이 되어 북적거렸다.

젊은이들이 옛날 시장으로 들어와 핫플을 만들고 정부가 이를 지원한

대단한 성공사례로 대통령이 이곳에 가보고 싶다는 한마디에도 떠들썩한 곳이 되었다.


물론 지금은 가게들이 계속해서 바뀌고

원래 시장 어르신들은 몇 남아있지도 않고

명백을 유지하는 가게는 몇 곳 되지도 않으며

볼 곳 없는 그런 공간으로 다시 쇠락 중이다.


 


나도 그때는 뭔가 내 일을 해보고 싶어서

궁리 끝에 덜컥 가게 이름부터 지었다.

그 시절 엄마 남자친구는 양봉을 하고 있었는데

엄마도 일이 년 따라다니더니 진짜 양봉업자가 된 것 같았다.

역시나 성과는 판매가 가장 중요한데 수완 좋은 엄마 덕에

남자친구네 꿀은 불티난 듯 팔리고 있다고 했다.

엄마가 생산한 꿀을 딸이 팔면 그거 좋지 않냐고.

꿀을 작게 포장해서 팔거나 꿀로 식품을 생산해서 파는 것도 괜찮다며

나는 엄마 이름을 따 가게 이름을 지었다.

‘영이씨네 꿀단지’

 


사실 내가 가게를 열었으니 꿀 사러들 오라고 하면 사실 올 사람도 몇 없었다.

나는 엄마만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그때도 지금도 사람을 힘들어하는 건 변함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름이 입에 착착 감기는 게 어쩐지 젊은이들이 많이 올 것 같지 않냐며

나는 ‘영이씨네 꿀단지’를 몇 번이고 소리 내어 말하며 신기해했다.


 


영이씨는 이 이름 덕에 사람들에게 많이 놀림받았겠지?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제일 먼저 철수와 영이가 나온다.

아니 영희였나? 아무튼.


그런데 엄마에게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영이씨가 지금 우리가 받은 필수교육까지도 받지 못했다는 것을 나는 서른쯤 돼서 알았다.

읽지도 않는 주제에 항상 책을 끼고 있는 나를 영이씨는 어쩐지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글씨만 몇 줄 읽어도 머리가 지끈지끈한데 쟤는 맨날 천날 저렇게 책을 읽어”하면서

자랑을 늘어놓던 영이씨.


 


한 번도 제대로 영이씨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던 나는 그렇게 영이씨네 꿀단지를 되뇌다가 그녀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한때는 엄마는 속물이라고 돈 밖에 모른다고 원망했던 적이 있다.

아니 오랜 시간 원망했다.


대학 3학년을 휴학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때.

엄마가 비용만 지원해 주면 나는 금방이라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것 같았다.

지원 없이 반년은 일하고 반년 공부하기를 두 해나 했지만 떨어졌다.

두 번째 시험을 치르고 나오면서는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이번엔 붙을 것 같다는 느낌에 기대는 더 커졌다.

하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고, 휴학한 학교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IMF가 터졌고 이때 졸업해 봤자 취직도 안될 것은 분명했다.

졸업 후 사회인이 되는 것을 유예했다.

학습지 선생님을 시작한 친구가 내게 복학하기 전 일 년만 해보라면서 일을 권했다.

2주 동안이나 합숙 교육을 받아야 했지만 나름 괜찮았다.

거기서 처음으로 1등이란 것을 해봤다.

내 이름이 불렸을 때 이건 뭔가 잘못됐다 생각했다.

일 년 정도 그 일을 했지만 그 뒤로도 학교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20대에는 그런 내 인생이 망한 것 같았고

그 책임을 엄마에게 떠밀었다.


내게 비용을 대주는 대신 영이씨는 부지런히 적금을 넣었고 모은 돈으로 주식을 했고, 잃었다

그걸 알게 된 나는 대학 졸업도 못하고 변변한 직장도 밥벌이도 못하는 게 다 엄마 탓이라 원망했다.

엄마는 이기적이라고. 자식이 아니라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러나 그때 우리의 삶은 각자의 선택으로 빚어졌다.

누구 때문에가 아니다.

후회가 있다면 그건 모두 자신의 선택 탓이다.


영이씨는 지금 내 나이에 딸을 결혼시키며 혼주 자리에 섰다.

스무 살에 딸을 낳아 키우며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이라는 꼬리표는

그녀를 길게 길게 괴롭혔을 것이다.


잠깐의 짧은 영화를 맛본 이 시장 골목처럼

영이씨의 화양연화도 짧았겠지.

영이씨가 품고 있는 꽃다운 시간이 언제였는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꿀을 키우는 남자친구와도 헤어지고

영이씨네 꿀단지 이야기는 꺼낼 일도 없게 됐다.

하지만 동네 그 시장 방앗간 옆을 지날 때면

나는 어김없이 영이씨네 꿀단지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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