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바리들의 어깨춤

22년, 그는 나와 세상에서 가장 오래 함께한 유일한 사람이 됐다.

by 미세스앤

해마다 건강검진을 한다.

최대한 많은 병을 못 찾아내다가 그냥 맞닥뜨리고 종료했으면 좋겠다는 게 내 바람이다.


회사를 안 다니면 나는 중병은 모르고 살았을까?

아니다. 내 바람과는 다르게 조금만 아파도 통증을 못 참고 병원에 쪼르르 달려가는 나는

일찍 병을 찾아내고 고쳐서 오래 살 확률이 높다.

슬픈 일이다.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나를 뿌듯하게 하는 게 있다면 신랑님의 검진이다.

일찍 삶을 마감할 생각이 없는 신랑님은 나와는 다르게 오래 살아야 한다.

65세에 내가 스위스로 가고 나서 여자친구라도 사귀려면

그 엄청난 뱃살은 지금 빼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들은 척도 안 한다.




결혼한 지 2년이 채 지나기 전에 신랑님은 지방간 판정을 받았다.

혼자 살 때와 다르게 결혼 후 먹는 양과 야식은 늘었는데 운동은 하지 않다 보니 생긴 병이었다.

전업주부였을 때는 전전긍긍하며 음식 조리법을 바꿔가며 먹이려 애를 썼다.

출산하러 병원에 가기 전 내가 한 일은 친정엄마와 만두를 빚어 얼리는 일이었다.

그즈음이 만두파동이 있을 때였고 만두피를 사서 빚는 만두처럼 세상 쉬운 요리는 없었다.

후라이드 치킨을 집에서 직접 할 정도였으니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미쳤었던가보다.

어쨌든 그 신랑님은 지금도 지방간이며 달라진 것은 내 걱정 정도가 되겠다.


거기에 몇 년 전에는 당뇨도 생겼다.

극소량의 약으로도 당은 잘 조절되고 있지만 이성적으로 봤을 때 그는 고위험군이다.

신랑님은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은 그를 잘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회사에서 나오는 배우자 건강검진을 신중하게 선택하고 검사결과지를 보고

가정의학과 선생님께도 공유한다.


평소에도 그가 피곤한 건 아닌지, 잠은 잘 자고 있는지, 감기 증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것들을 살핀다.

잔소리를 늘어놓다가도 한 번씩 그런 말들을 한다.

“자기는 어릴 때 부모님이 살뜰하게 돌봐준 적 있어? 왜 할머니 계셨잖아”

“아니지. 할머니는 큰형만 예뻐라 했지. 네 번째까지 누가 신경 안 쓰지”

“그렇지? 나도 그랬는데. 아빠는 없고, 엄마는... 그러니까 우리는 그때 못 받았던 관심과 사랑을 서로에게 나눠주자. 응?”

황당했는지 이럴 때 신랑은 대답을 안 한다.

내가 응? 응? 하고 몇 번이고 대답을 강요하고 나서야 그래그래 하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서로에게 살뜰한 애정을 보이며 돌봐줄 사람이 둘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신랑님은 지난번 내가 몇 시간이나 골을 부렸을 때도 봐줬다.

골 부리고 난 다음날 두통으로 끙끙 앓으며 귤을 찾았을 때도 나가서 바로 귤을 사 왔다.

그는 나처럼 오래 담아두고 삐치지 않는다.

가끔 그가 분통이 터져서 내게 뭐라 뭐라 할 때는 까칠이인 내가 가시를 다 내리고

눼눼하면서 굽실거려 주기도 한다.


22년 내내 그랬던 것은 아니다.

22년이란 시간은 맞지 않는 돌출부를 서로에게 딱 맞춰 깎아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잘 길들여진 신발처럼 서로에게 편한 사람이 됐다.

대단한 사회적 성공과 부를 거머쥐지는 못했으나

서로의 못남과 없음을 쓰담쓰담하며 지내고 있다.

(그러느라고 지난 추석 연휴때 결혼기념일이 지난 것을

둘다 잊고 있었다. 뒤늦게 케이케에 22초를 올려놓고 서로 뿌듯해했다.)


세상 기준으로는 보잘것없는 잔잔바리들이지만 서로가 있음으로 우리는 가끔 어깨춤을 들썩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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