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문학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연생 Oct 14. 2019

황정은 '양의 미래', 임솔아 '병원'을 읽고

<현대사회는 알 수 없다> - 문학비평

<현대사회는 알 수 없다>

‘자아의 실종’, ‘알 수 없는’ 현대사회. 두 소설의 공통점을 생각했을 때 내 머리에 떠오른 구절이다.      


<자아의 실종>

 두 소설 중 먼저 황정은의 ‘양의 미래’를 읽었다. 큰 창을 가진 서점의 설정이 인상적이었다. 조명이 많아 도시적이지만 바깥과 가까워 자연의 변화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낭만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공간에서 이질적인 요소는 바깥과의 연결불가능성이다. 흔하지 않은 구조의 서점을 설정하면서 작가는, 햇빛을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피부로 받을 수는 없는 ‘나’, 그리고 ‘나’를 그렇게 만든 거대한 사회적 구조를 보여준다. 투병중인 어머니, 고요한 아버지, 잘린 직장에서 고생하는 ‘나’를 적장 힘들게 한 것은 어린 자신을 ‘아가씨’라고 부른 누군가였다. 내가 볼 때 ‘청소년 알바’는 흔해졌고, 일종의 문화처럼 여겨지면서 그 속의 아픔은 쉽사리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일을 하는 자체는 가정환경으로부터 자연스레 형성되었을 것이고 그러한 가정이 많다보니 사회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진실한 아픔은 그런 삶이 원래부터 ‘나의 것’이 아님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이다. 학생이 아니라 아가씨로서의 정체성을 나도 모르게 갖게 된 나를 발견할 때.

 임솔아의 ‘병원’의 유림은 이제 자신의 정체성을 아예 ‘아가씨’화 했나보다. 누구나 겪는 딱 그 정도만 힘들게 살았고, 소년소녀가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과장의 무례한 말에도 덤덤하다. 그러나 유림이 정말 ‘아가씨’처럼 강인한 존재였을까? 의사에게 편지를 쓰면서 유림의 글씨체는 점점 어른스러워진다는 서술이 등장한다. 사실 그녀 역시 어린 학생이었을 뿐이었다. 대체 왜 그들의 자아는 실종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경제적인 논리가 지배적인 오늘날의 사회 때문일 것이다.


<알 수 없는 현대사회>

 두 소설 모두 쉽사리 알 수 없는 요소들이 뚜렷하게 등장한다. ‘병원’에서는 ‘알 수 없음’이 ‘소년소녀가장’, ‘기초생활수급자’에 대한 사회의 태도와 완벽히 비튼 의사의 윤리로써 드러난다. 과장의 말과는 달리 유림은 뼈 빠지게, 성실하게 일하다가 손해를 배상할 사태에 직면했으며 지원비는 같이 살지도 않는 가족이 챙겨갔다. 한편 ‘양의 미래’에서는 진주의 실종과 지하실의 벽을 통해 은유적으로 ‘알 수 없는’ 현대사회, 그리고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신고할 수 없는) 현대사회를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현대사회와 그 구성원들에 대해 내 입장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판단하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김미정은 비평문에서, “사람들은 지금, 범주와 경계에 민감”하며, “‘우리’안에서 자꾸 자격을 판정하고 심사하고 결속 혹은 배제하려”한다고 말한다. 푸코는 광인과 ‘정상인’을 가르는 기준은 근대의 산물임을 제시한 바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동일성은 동일화된 차이라고 한다. 동일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차이의 반복을 차이 없는 반복으로 변형시켜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결국 서점에서 일하던 ‘나’와 ‘병원’의 유림은 신자유주의와 결부된 현대사회에서, 가난한 집안환경에서 일터로 나가는 정체성을 내면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공공 부조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제도적으로 판정기준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모두 차이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내 마음대로 공통점을 추출하고,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을 매도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비단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적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은 출산을 해야 하며, 대학생들은 대외활동에 학점에 ‘배낭여행’에 친구관계까지 원만해야 하고, 중고등학생들은 점수높이기를 강요받는다. 읽기를 잠시 멈추고, 자본주의의 지금 현대사회에서 이것 말고 어떤 삶이 바람직할 것인지 생각해보라. 잘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가? 정답은 없다. 사실은 그 질문 자체가 부적절하다. 단 하나의 바람직한 삶은 없다. 이런 당연한 이치조차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없다. 어쩌면 앞으로도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들은 영영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끊임없이 고민해야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최은영 '몫', 권여선 '하늘 높이 아름답게'를 읽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