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를 이해하는 방법> - 문학비평
<몫>의 인물들은 ‘희영 vs 나머지’로 읽혔다. 희영은 ‘타인의 상처에 대한 깊은 수준의 공감’을 한다.(p.106) 나머지는 ‘살인사건의 피해자와 같은 삶을 경험해본 적도 없고 고등교육을 받는 희영은 그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없다’고 한다.(p.117) (물론 이는 정윤의 격한 말이었으나, 다른 부분에서도 희영과 나머지의 대립 구도가 반복되어 나타난다.) 대립되는 지점에서 저자의 선택은 유보적이다. 정윤의 말을 감정적이고 인신공격과 비슷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윤의 말에 공감하기도 한다. 강지희의 <경계 위에서>는 희영의 입장에 가까운 듯 하다. 여성 내부의 계급 차를 지적하는 것은 여성 간의 연대를 막는다(p.69)는 서술이 있다. 여성들의 ‘연대’를 지향점으로 삼는 것이다. 그렇기에 계급이 다르다는 이유로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은 폐기되어야 마땅한 생각인 셈이다.
나는 공감불가능 문제를 간단히 도외시하는 이러한 태도에 동의할 수 없었다. 여성이라는 정체성 하나의 동일성만으로 모든 차이를 뛰어넘는 연대로 우리가 ‘직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해 내가 존경하는 문화인류학 교수님의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잠시 빌려오고 싶다. 내 호기심, 질문 자체가 나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며, 이런 정치적 포지션의 차이는 쉽게 뛰어넘을 수 없는, 뛰어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군을 “정상적”으로 제대한 사람은 6개월 만에 부적응 사유로 제대한 친구의 고통스러운 심리를 이해하지만(한다고 생각하지만), 구조적 부조리함에 공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겨내지 못한 개인의 무력함을 느낀다거나, 명문대 재학생으로서 고졸 취업준비생의 아픔을 굳이 들춰보지 않는다거나, 서울역 홈리스의 증언을 듣고 정책의 문제에 공감하지만 더 이상 행동하지는 않는 경우가 그 예이다. 이게 매우 큰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싶다기보다는 원래 인간이 그렇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그저 출세하고 싶은 평범한 인간의 욕망을 발견했듯 우리의 악은 평범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성과 남성을 큰 범주에서 나누고, 내가 여성이라면 여성 전체와 연대해야만 하는 ‘강박’은 정윤이 말한 것처럼 ‘오만한 생각’일 수 있다. 오히려 나와 타자의 차이, 나를 둘러싼 상황적 현실과 정치적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 왜 그래야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약자와의 연대를 자처하는 것은 그 외의 사람들에 대한 배척으로 나타나기 쉽다. 맞불 시위 도중 ‘한남’의 얼굴 사진을 찍고 불법유포를 한다거나, 젠더 문제가 아니라도, 자발적으로 노약자석에 앉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틀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거나, 아동학대 뉴스에는 기겁하면서 가정 내 체벌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등 모순적이거나 극단적인 생각은 모두 진정한 성찰이 부족한 것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그렇게 보면 ‘조용히 기지촌 활동가의 삶을 시작’한 희영(p.120)은 뛰어넘을 수 없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출발을 한 것이 아닐까. 강지희의 비평문에서는 이 부분을 간과했다고 생각한다.
비평문에서는 마리아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나는 베르타에 주목했다. 베르타는 성당 자매들을 아무 의미없는 말을 주고받는, 전혀 고귀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다르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소설 후반부에서 베르타는 마리아의 죽음을 알고 숨이 가빠오며, 가사도우미 일을 회상하면서 두통을 느끼기 시작하고, 마지막에서는 자신도 똑같이 전혀 고귀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베르타는 마리아와 함께 태극기를 팔러 가면서 역 이름에 낯섦을 느끼기도 하지만 열차 안에서 평화로움을 느끼는 등 전반적으로 긍정적이다. 그런데 양산에 눈이 찔리는 바람에 마리아의 구취를 맡게 되며, 그동안 마리아가 얼마나 친절했는지, 태극기를 팔러 갈 때 나름 괜찮은 경험이라고 생각했었던 것과는 관계없이 ‘엉겁결에’ 마리아를 밀쳐버린다. 과연 이것이 단지 구취 때문이었을까? 소설에 직접적으로 표현돼 있지는 않았지만 베르타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그래서 파독 간호사가 되었고 넉넉지 않은 형편에 살며 팔리지도 않는 태극기 장사를 하는 마리아를 자신도 모르게 나와 다른 ‘계급’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은 아닐까? (영화 <기생충>에서도 표현되듯 냄새는 사람의 민낯을 드러내면서도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오는 요소다. 그렇다면 냄새를 맡고 본능적으로 마리아를 밀친 것에서 위와 같은 내용을 생각하는 것은 무리는 아닐 것이다.)
어쨌든 베르타는 마리아가 죽고 나서야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자각할 수 있었다. 약자,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섣부른 편가르기보다는, 무엇이 문제인지, 나도 모르게 내가 행해오고 생각해온 차별이 있는지를 진정으로 성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