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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연생 Sep 27. 2019

문학잡지, 어렵지 않아요

문학잡지 '릿터'의 디자인철학

              

 이번 글의 주제는 민음사에서 격월에 한 번 출간되는 문학잡지, ‘릿터Littor’이다. 릿터는 2016년 8월 창간되었으며, 제목의 의미는 Literature(문학)와 –tor(-하는 사람)의 합성어다. 릿터는 민음사에서 운영하는 ‘민음북클럽’에 관심을 갖고 홈페이지를 방문하자 뜬 광고 팝업에서 만났다. 표지의 디자인이 나를 한 눈에 사로잡았다. 문학잡지라는 매체는 처음이었거니와 옛날에 출판된 흑백 카툰과 같은 표지의 조합. 그렇게 구입한 릿터 19호의 내지 역시 한눈에 익숙해지기 힘든 구성이었다.



 먼저 목차다. 잡지의 목차라고 하면 맨 앞 부분에 연속적으로 배치되고 화려하게 치장된 광고들의 페이지 속에 묻혀 제대로 읽기 힘든 경험이 떠오른다. 미용실이나 병원에서 너무나 긴 대기시간을 참지 못하고 펼쳐든 시시한 잡지들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명품시계 사진이 지금 광고 지면에 실린 것인지 유료 리뷰에 실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릿터의 목차는 확연히 구분되는 레이아웃에, 다른 속지와 다른 코팅된 재질로 깔끔하게 디자인되었다.

 안에 담긴 글도 마찬가지다. 한쪽에 제목과 저자, 저자소개가 ‘똑같은’ 폰트와 크기로 인쇄되어 있다. 얼마나 보기 편한가! 그러면서도 굉장히 낯설었다. 자칫하면 투박해질 수 있는 디자인이지만, 문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는 문학잡지에 채택되자 훨씬 다가가기 쉽게 느껴졌다. 일 년에 책 몇 권 안 읽는데요, 소설도 안 읽는데 잡지는 무슨, 이라고 생각했는가? 릿터는 오히려 문학의 세계에 입문하는 것을 도와줄 것이다. 특히 ‘국뽕’을 찾기 위해 영암왕인문화축제에 갔다가 수많은 노인이 두 시간동안 내리 글을 쓰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널뛰듯 한다’는 표현을 재점검하고, 영월간에서 키득대는 ‘전국 축제 자랑’ 코너가 그렇다. 전혀 어렵지 않다. 잡지의 편집방향을 잘 표현한 디자인이라 생각한다.


릿터의 단편소설들.


 표지와 커다란 폰트로 시작하는 글들이 낯설었다면, 단편소설 부분은 익숙했다. 그렇다, 익숙했다. 이유모를 익숙함에 책장을 이리 넘겼다 저리 넘겼다 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책 가장자리 부분이 그라데이션으로 디자인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가만히 보았더니 단편소설의 시작은 아주 검게, 끝은 밝은 회색으로 이루어졌으며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책 제목이 끝날 때쯤엔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 가장자리라는 것이, 글이 ‘단행본’ 사이즈에 쏙 들어갈 두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디자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면서 ‘잡지’라는 형식에 주목했다. 책은 읽었어도 문학잡지는 처음 읽은 나였기에 자연스레 잡지와 책읽기의 차이를 생각했다. 세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첫째, 일반적인 단행본 소설보다 큰 사이즈의 문학잡지의 공간활용에 대한 고민이다. 큰 지면에 글을 담으면 한 면에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건 물론이고 기존 책과 다른 느낌을 준다. 소설과 시를 제외한 모든 글이 일반적인 잡지처럼 들어가 있다. 그런데 단편소설과 시는 두꺼운 가장자리 안에 쏙 들어와 있다. 소설을 읽으며 책장을 넘길 때 잡지가 아니라 책을 읽는 경험을 주기 위함일 것이다.


 둘째, 두께감이다. 잡지는 한 권 안에 많은 글이 들어가 있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읽는 단편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다. 책을 읽을 때 이만큼 읽은 내가 뿌듯하기도 하고, 뒤에 아직도 분량이 많이 남았을 때 재미있는 소설이면 아쉽기도 하며, 어려운 책이라면 부담감을 느끼기도 했다.  잡지도 이렇게 우리에게 익숙한 책읽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부담을 갖지 마라는 철학에서 그라데이션 처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셋째, 제목을 각인시킨다. 단편소설집을 읽던 나는 표제작 외에는 제목을 모두 잊어버리기 일쑤여서 자주 책장을 넘긴다. 소설의 제목은 후반부로 갈수록 흐려진다. 뒤로 갈수록 제목이 진해지는 디자인은 굳이 앞장으로 돌아가는 수고를 덜어주고 제목을 각인시켜 주었다. 이는 제목을 고심하는 작가의 수고를 알아준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고, 더 좋은 감상을 하게 해 준다. 단편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는 그 틀을 깨고 나온다. 마치 책읽기에서 잡지로 다시 돌아오라는, 그래서 우리 잡지를 다른 부분도 잘 읽어달라는 메시지같다.



 마지막 에디터의 말이다. ‘모두가 다른 친구들이 또 모두 다른 곳을 보고 있다.’ 표지를 다시 보았다. 삼각형, 원, 역삼각형, 긴 다리가 달린 조그만 사각형, 눈만 빼꼼 내민 사각형들이 서로 포개어져 어딘가를 보면서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었다. 같은 문학작품을 접하더라도 그것을 읽는 목적과 얻는 감흥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닐지. 어떤 해석이든 가능하다는 건 아닐지. ‘문학잡지, 어렵지 않아요.’라고 이 잡지의 디자인이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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