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 p9
(책 전체에 대한 감상 아니고 이 구절에 국한된 감상이다) 장애인에게 ‘희망을 가지라’는 말이 별다른 문제가 없어보이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최근에 이런 논의들(이 책 외에도)을 알기 전, 아주 어렸을 때 부터 이런 말들에 대해 굉장히 이상함을 느꼈다. 장애인에게 하는 말이 아니어도 누군가에게 누군가가 이와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고, 나 또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굉장히 이상함을 느꼈는데 그 이유를 알지 못했었다. 그래서 ‘왜 그런 말을 했는지’로 우회적으로 물어보면 좋은 의도로~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최근에서야 그게 왜 문제이고 왜 이상한지를 정합성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장애인에게 ‘희망을 가지라’는 것은, 쉽게 말해 “네가 뭔데 나한테 희망을 가지라 마라야”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희망을 가지든 말든. 희망을 가지고 말고는 본인의 문제이지 마치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이 잘못인 것 마냥 생각하게 한다. 희망이라는 단어도 문제다. 지금 현재 너의 모습은 비참하니까, 우리 같은 일반인, 정상인의 삶이 올바르므로 우리같이 살 수 있도록 희망을 가져봐, 라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의들이 오직 ‘장애’라는 범주에 갇힌 것은 요즘 논의들의 한계이다. 여전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 장애는 저기 저 편에 있는 대상인 것처럼. 하지만 장애라는 범주는 굉장히 모호하고 포괄적이기 때문에, 나는 우리 모두가 장애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모두가 시력 10이 넘는 마을에서는 시력이 2만 되어도 장애일 수 있으나 안경과 렌즈가 보편화된 사회에서 시력 2는 일반인 수준을 넘는다. 굳이 다른 사회에 가지 않더라도 우리 몸은 언제나 비정상과 장애로 가득하다. 혈압, 콜레스테롤 수치, 근육량, 신장, 몸무게, 관절, 이 외에도 수많은 수치들을 동시에 고려한다면 과연 정상인이란 가능한 것인가? 단지 부분적인 정상만이 가능한 것이다. ‘나는 시력은 정상이야’처럼.. 또한 요즘의 논의는 신체적인 장애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나는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개인의 모든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성적이 낮은 학생에게 희망을 가져봐, 달리기 기록이나 체력 검정 성적이 낮은 학생에게 희망을 가져봐 등등의 이야기가 모두 잘못이 있음을 모두가 깨달았으면 좋겠다.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성적, 체력을 높이고 말고는 남이 상관할 것이 아닌데다, 성적과 체력이 좋은 것이 올바른 것이라는 사고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신체적 장애뿐 아니라 개인의 차이(의 모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의 대부분 역시 이런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