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뒤샹
강의 네 번째 시간, 주제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술의 주도권은 어디로 옮겨갔는가’였다. 미국, 특히 뉴욕이 현대미술의 중심이 되었다. 전쟁 전까지는 프랑스 파리가 세계 미술의 중심지였지만, 전쟁으로 인해 많은 유럽 작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하거나 활동 무대를 옮겼다.
마르셸 뒤샹, 막스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페기 구겐하임 같은 작가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마르셸 뒤샹의 작품, <샘>을 마주했다. 이 작품은 뒤샹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당시 화장실에서 볼 수 있던 남성용 소변기였다. 그는 단지 소변기에 가상의 작가 이름(R.Mutt)을 서명만 했을 뿐이다. 이 작품이 전시회에 놓이자 미국 독립미술가 협회 위원들은 "이게 무슨 예술이야!"라면서 역정을 냈다고 한다. 결국 이 작품은 전시장 한 구석으로 치워졌다.
이 작품이 공개된 때는 예술은 예술가가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예술은 대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념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 그는 자신의 철학을 보여준 것이다. <샘>은 20세기 이후 예술계에 큰 영향을 준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공장에서 만들어낸 작품에서도 예술성을 발견한 그의 안목이 신선하다. 개념 이면에 이 작품으로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게 뭘까 생각해 본다.
Y의 시간
하얀 몸을 오므린 그릇 하나.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 고요히 앉아 있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누구도 외면하지 못하는 자리.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앞에 무릎을 굽힌다. 말이 없고 향기도 없지만, 그곳은 나를 가장 많이 품는다.
세제 냄새도, 묵은 냄새도 삼켜내고, 침묵한 채 모든 것을 흘려보낸다. 나의 피곤, 나의 쓸모없는 말들, 어젯밤의 슬픔까지도. 나는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잠시 투명해진다. 텅 빈 그릇은 다시 채워질 준비가 되어 있고, 나는 그 안에서 다시 살아갈 준비를 한다.
갤러리에 그것을 올려놓은 사람이 있었다. 뒤샹. 그는 그것을 예술이라 불렀다. 아무도 예술로 보지 않았던 것을. 나는 생각한다. 아마도 그는 그날, 소변을 참다가 갤러리로 달려갔을 것이다. 땀이 이마에 맺혔고,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이치를.
우리의 삶도 그렇다. 꽉 채운 하루를 내려놓고, 고요한 곳에서 비울 줄 알아야 다시 걸을 수 있다. 변기는 말이 없지만, 나를 이해하고, 나를 흘려보낸다.
오늘도 나는 그 하얀 도자기 앞에 앉는다. 작은 성소처럼. 조용히 나를 내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