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 도서관에서 재능을 나누어줄 시니어 양성과정으로 경기도와 교보문고가 주최하고 후원했던 시니어독서도우미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십년도 더 된 일로, 도서관에서 만난 아이들 또는 손주들에게 읽어줄 그림책을 선택하는 방법이나 함께 읽는 법 그리고 간단한 독후활동까지 안내하는 수업이었습니다. 너댓 개 도서관의 강의를 맡았던 터라 이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선생님들이 꽤 많았습니다.
전직 교장, 교감 선생님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아오신 분들로, 그분들 앞에서 20년이 채 안된 나의 경력은 피라미에 불과했지요. 따라서 첫 시간에 자칫 어리버리한 모습을 보였다간 hegemony해게모니를 빼앗길 게 분명하거든요. 어깨에 힘을 빡 주고 들어간 첫 수업에서 역시, 뭘 좀 알려드리려 하면 "내가 교직생활 40년인데 그걸 모를까봐?"하며 자신만만해 하시는 분은 물론, 교사 시절에 반 아이들에게 읽게 했다는 '톨스토이 단편집'을 유아들에게 읽히겠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심청전'으로 효도의 의미를 알려주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시던 분의 열변도 떠오릅니다. 대강 이런 분위기 속에서 두달이 넘는 양성과정이 이어지는 동안 유독 눈에 띄는 분이 계셨습니다.
'겸손'이라는 단어로 기억되는 정선생님은 누구에게나 늘 따뜻한 미소를 보이셨습니다. 하루는 그림 전시회를 열게 됐다며 도록을 내미시는데 맑고 깨끗한 수채화였습니다. 취미로 하셨다는 그림은 선생님을 꼭 닮아 있었습니다. 인연이었나 봅니다. 이후에도 전시회를 열 때마다 연락을 주셨고, 작품 사진도 보여주셨으며, 명절이나 기념일마다 안녕을 물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또 하나의 문자 "전시회를 열고 작품 한 점이 남았는데 장선생에게 주고 싶다"는 연락을 해 오셨습니다. 감사함을 넘어 황송한 순간이었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속내를 다 드러내지 않아도 고마운 분이 또 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난독증을 극복하고 작가가 된 패트리샤 폴라코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고맙습니다, 선생님>을 종종 꺼내보게 하는 분입니다. "넌 네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 있니?"라는 격려가 암울한 처지에 놓인 제자를 변화와 성장으로 이끈 이야기죠.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자’는 급훈만 보아도 반 아이들의 우정을 중요하게 여기셨던 중학교 1학년 3반 담임 김진환 선생님. 두꺼운 유리알 안경을 오랫동안 쓴 흔적으로 움푹 페인 콧등, 작은 두 눈에 비쩍 마르고 키가 작은 총각 선생님이셨습니다. 국어 교과서에서 시를 배울 때면 드라마 ‘응답하라 1988’과 딱 어울리는 낡은 카세트를 교탁에 올려놓으시고, 음악을 들려주시며 한명 한명 시낭송을 시키셨습니다. 음률을 느끼며 시를 낭송하는 사춘기 소녀를 지긋이 바라보시며 칭찬을 넘치게 해 주셨지요. “발음이 좋다, 목소리가 예쁘다, 시의 분위기를 잘 살리는 낭송이었다”는 식이었습니다.
성적 좋은 아이들 몇 명을 학습이 뒤쳐진 아이와 짝을 이루게 하여 학습 지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일종의 멘토 멘티제를 도입하신거죠. 방과 후 짝을 이룬 아이들이 공부를 하고 있을 때면 과자를 사들고 오셔서 격려해주셨고, 뒤쳐진 아이들에게 #'석두화'라는 농담을 건네시며 친근한 응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5학년이 되도록 글을 읽지 못해 친구들로부터 벙어리라는 놀림을 받는 트리샤를 대하는 폴커 선생님의 모습과 겹칩니다.
알파벳조차 읽지 못하는 아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던 김진환 선생님의 모습은, 교사로서 마음을 다해 제자에게 사랑을 베푼 폴커 선생님의 진정성이었습니다. 공부를 못하면 차별받는 게 당연했던 시절에 선생님은 아주 공평하고 민주적인 분이셨지요. 사춘기 여학생들에게 꽃이라는 말을 주저 없이 하신, 마음을 다해 제자들을 사랑하신 분입니다. 패트리샤 폴라코는 30년 뒤에 우연히 지인의 결혼식장에서 폴커 선생님을 만나 고마움을 전할 수 있었는데, 난 언제 따뜻한 추억을 남겨주신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친구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셨고, ‘이해, 용서, 사랑’을 강조하셨던 나의 선생님, 고맙습니다.
#석두화 : 돌머리 꽃. 선생님과 우리들의 관계가 워낙 좋아 애정 어린 말투로 "나의 석두화들~"하고 말씀하시면 우리 모두 깔깔깔 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