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욱국을 끓이며

삶의 동기

by 하리

"죽을 날이 가까운 사람이 먹고 싶은 게 뭐가 있겠어."

마트에 가자는 말에 구십 노모의 답변입니다. 요즘 들어 다리에 기운도 없고 바깥 나들이도 꺼려하시더니 맛있는 게 있는지 보러가자는 말에 심드렁한 말투로 "그래도 되고"하십니다. 대형 프렌차이즈 마트는 아니지만, 해산물과 정육, 야채와 기타 식재료들이 그득그득 있는 제법 큰 동네 마트입니다.

카트를 잡고 밀어가며 한발한발 과일 코너부터 찬찬히 살핍니다. "이건 어때?"나의 말에 마음에 들면 "그래. 하나 사자." 이런 식의 대화를 해가며 찬찬히 둘러 봅니다. 해물 코너에 들어서니 생굴이 있습니다. 싱싱해 보이는 게 초고추장을 곁들이면 입맛이 돌게 분명합니다. "엄마, 굴 먹을까?" 엄마 얼굴이 밝아지십니다. 워낙 해산물을 좋아하시니 이 코너를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엄마, 회 먹고 싶지요?"

"먹고 싶지, 마음 같아서는 한 접시 다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냉장 진열대에는 회 접시들이 보기 좋게 줄지었습니다. 참치와 연어 뱃살도 때깔이 좋습니다. 이제부터 어머니의 표정이 좋아 집니다. 해산물 코너를 돌 때면 어린시절 이야기가 하나씩 떠오르는 듯 미소 가득이시죠.

"나는 어릴 적에 고등어회도 먹었어." 래퍼토리가 시작됩니다. 낚시를 좋아하시는 외할아버지는 장녀인 어머니를 데리고 종종 강이나 바다에 낚시를 다니셨답니다. 어린 딸이던 어머니는 낚시꾼 아버지와 고기도 잡고 그 자리에서 회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나 봅니다. 낚시터에 할아버지가 나타나면 주위 낚시꾼들은 물고기를 향해 "느그들 아버지 오셨다!"고 외치셨답니다. 외할아버지가 물고기를 워낙 잘 낚으셔서 '물고기 아버지'라 불릴 정도였다고 기억하십니다. 이미 수십번은 들었던, 허나 늘 처음 말하고 처음 듣는 듣는 냥 어머니의 추억담을 향한 예의를 지켜가며 마트 나들이가 이어집니다. 횟감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회상 덕분에 우리 삼남매는 '고등어 회는 먹어본 사람만 아는 맛'으로 결론을 지었습니다.


야채 코너를 지나가며 "배추 한 통 사서 겉절이 해먹으면 좋겠네" "가지나 깻잎은 먹지 말라니까 안 되고..." "열무 김치도 해 먹으면 맛있지" "오이 한 봉지 사자" "아욱 한 단 살까?" ......

먹고 싶은 게 없다고 하셨지만, 막상 실물을 보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마트에 모셔가게 됩니다. 재래시장이었다면 더 좋았겠으나, 편의상 마트를 선택하곤 하지요. 오래 걸을 수 없고, 배추 한 통 조차 들 힘이 없으며, 한발한발 천천히 걸어야 하지만 마트는 노인에게 삶의 동기를 부여해 주는 확실한 장소입니다.

뜨끈한 아욱된장국물에 쌀밥, 맛있다


넉넉하게 담아 온 생굴은 당일 점심으로 초고추장에 찍어 한 접시 뚝딱 먹었습니다. 맛있게 드시는 어머니를 보니 마음이 흐뭇합니다. "오랫만에 먹으니 맛있네"하시는 어머니 말씀도, 입가에 묻은 빨간 초고추장도 보기에 좋았습니다.

그리고 3일이 지난 오늘 아침 드디어 신문지에 꽁꽁 싸둔 아욱을 꺼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욱을 손질해 달라고 부탁드린 뒤, 된장과 양파, 냉동해물, 고추, 간마늘과 파를 넣고 아욱국을 끟여 보았습니다. 어릴적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구수한 맛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성공입니다. 방금 끓인 아욱국에 흰 쌀밥을 말아 한 숟갈 먹어 봅니다. 뜨끈한 국물이 좋은 계절이지요. 오늘의 배움은 아욱을 씻을 때 바락바락 씻어야 한다는 것 ㅎㅎㅎ 이 나이에도 부모에게 배울 게 많습니다. 물을 게 많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시간을 내어드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