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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글치글치

"잊고 살았는데, 생생하게 기억나"

타인이 만들어준 나의 역사

by 하리

주의! 곧 집중, 그리고 기억 호출

주의는 기억을 재소환 한다. 주의가 시작되면 대상을 제외한 나머지는 정지된다. 즉 주의에 집중하게 된다.


그녀는 어린시절 자신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해 주고, 많은 음악을 들려준 언니 덕분에 지금까지 예술 친화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도 클래식 음악으로 하루를 보내고, 많이 읽지는 못해도 좋은 책은 구입하여 가까이 두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모두 언니 덕분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 들었던 그녀의 음악 이야기가 시작되자, 글치글치 회원들은 20대에 푹 빠졌었던 팝송에 얽힌 추억을 그러모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길거리 차트를 떠올렸다.


길거리 차트라는 단어가 언급됨과 동시에 그녀는 “어머어머 나 완전 잊고 살았어. 기억조차 못하고 살았네.”

그녀의 뇌 한 구석에서 언제 부를지 몰라 쪼그리고 앉아 대기하고 있던 대구 동성 레코드에서의 일들은 가라앉히지 못한 흥분과 함께 기분 좋은 목소리로 재연되었다.

“이야기하다보니 또렷하게 기억이 나네.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나~~~어쩜 이럴 수가. 까맣게 잊고 살았어.”로 시작된 그녀의 말은 마법의 시간장치가 되어 우리를 그때로 데려갔다. 글쓰기는 까맣게 잊고 지내던 기억을 꺼내 놓는 능력을 가졌다. 글치글치를 통해 오래된 장면을 호출해 낸 그녀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글쓰기는 주의를 작동시켜 지난날 한 시점을 기억하게 했다. 그것도 아주 또렷하게.


사람의 기억력은 20대~30대를 정점으로 50대 이후에 후퇴한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오래된 기억들 가운데 종종 호출되는 기분 좋은 일들 또는 아주 험악하여 평생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지만, 대부분의 기억들은 나이가 들면서 사라진다. 신경학자들은 종종 “몇 년 동안 기억을 꺼내지 않으면 두뇌에 그 기억은 중요하지 않다는 신호를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녀의 동성 레코드는 생생한 기록화가 되어 우리 앞에 펼쳐졌다. 생활하는데 중요한 기억이 아니었겠지만 어느새 엄청난 보물이 되어 그녀의 뇌 한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육중한 뚜껑으로 닫혀 있던 함을 열어 보물을 하나씩 꺼냈다.

대구의 한 레코드바(출처 네이버 이미지)

음악이어서 그랬을까? 사람은 20대에 즐기던 음악을 평생 듣고 산다고 하던데. 고등학교 시절부터 20대까지 즐겨 들었던 음악이나 대중가요, 팝송을 접하게 되면 당시의 분위기, 그때 곁에 있었던 사람이나 음악이 흘렀던 장소가 연달아 떠오른다. 그녀가 떠올린 팝송과 대중가요는 곧 동성레코드의 위치와 구조, 그리고 함께 했던 사람들로 이어졌다. DJ들이 많이 들렀고, 저작권을 무시하고 녹음하던 시대의 대명사 길거리 차트라는 말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공테이프, 그리고 LP 판을 돌리던 모습까지 어느 하나 추억이 아닌 것이 없었다.


타인의 기억에 의해 호출된 역사는 곧 나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 어린시절 거실의 한쪽 벽을 차지했던 텔레비전, 그 옆에 나란히 턴 테이블과 양 가장자리에 커다란 스피커 한대씩. 일요일이면 사운드오브 뮤직과 같은 영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청소를 하던 모습이 머릿 속을 스친다. 주방에서 간식거리를 만들고 계시던 어머니가 노래를 따라 부르시면, 우리 삼남매는 더 크게 불러댔다. 음악을 좋아하시던 어머니는 종종 레코드점에 들러 레코드를 구입하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를 데려가 의견을 물으셨다. 덕분에 그때 봤던 벤지 영화음악도 사고, 코미디언이 부른 캐롤송도 살 수 있었다.


시내 한복판에 자리하던 중앙극장의 아래층 아주 작은 상가의 레코드점에서는 늘 음악이 흘러나왔다. 유동인구가 많은 그 거리에 가면 당연히 들리던 레코드점의 음악 소리에 몸이 먼저 반응하곤 했다. 떠올려보면 두어 평도 안 되는 아주 작은 상가였다. 레코드점 사장님이 들려준 음악 덕분에 그 길을 지날 때마다 흥이 났던 기억, 그 앞에 자리 잡고 앉아 있던 달러 아줌마들은 맨날 듣겠네~ 하는 말을 하며 지나갔던 우리들의 모습,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 바로 들리던 음악 덕분에 기분이 좋다고 말하던 친구들의 목소리, 이 기억은 내 인생을 만든 역사의 한 장면이다. 사장님이 내 역사를 만들어 주었으니 타인이 만든 내 역사라 하겠다. 그녀의 동성 레코드는 나에게 전달되어 주의를 작동시켰고, 이내 중앙극장 아래 쪽의 레코드점을 기억하게 했다. 타인이 만든 나의 역사. 하얼빈의 안중근 의사도, 레코드점의 사장님도, 대구 동성레코드의 그녀도 내 역사를 만드는데 일조한 셈이다.


내 인생을 만들어준 소중한 장면들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얼마나 서운할까? 그래서 우리는 가끔 사진과 일기장 또는 다이어리를 꺼내본다. 그리하여 행복했던 순간들로 되돌아가 추억에 잠겨 미소 지을 수 있다. 오늘도 우리 같이 사진 한장 해요!


한줄요약 : 글쓰기는 주의를 작동시켜 까맣게 잊고있던 과거를 호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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