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남이 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남에 대해 "걔는 절대 행복하게 못 살아.", "걔들은 절대 성공 못해. 망할 거야."라고 장담하곤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라고 물으면 "그런 마인드로는 ~", "딱 보면 알지"라는 자기만의 평가 속에서 확신에 차 말했다. 그런 그 친구가 아직 진로를 결정하지 못해 방황할 때, "너는 뭐하고 싶은데?"라고 물으면 그 친구는 쉽게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어.. 뭐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뭐지..?
남들의 인생은 그렇게 확신에 차 말하면서 왜 자기 인생은 확신하지 못하지? 실제로 그 친구가 불행하게 살 거란 사람이나 망할 거란 사람들은 모두 그 친구보다 부지런히 살며 더 많은 것을 이루기도 했으니 굳이 남의 인생에 이렇다 저렇게 말하는 것이 의미 없어 보였다. 그저 자신의 평가와 장담에 도취되어 있던 친구의 오지랖에 지쳐 손절하며 깨달은 것은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건 나 자신에 대한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장담 : 확신을 가지고 아주 자신 있게 말함. 또는 그런 말.
내가 본 남의 일부분을 보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을 장담할 수 없다. 내가 보는 그 일부분이 그들의 전체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위험한 사고방식 아닌가?! 겉으로는 허술해 보여서 속으로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지금은 부족해도 나중에는 완벽해질 수도 있으니깐. 오로지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건 나에 대한 것이다.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뭘 잘하고 못하는지 등등. 그런데 그 마저도 온전하지 않다. 내가 과거에 좋아했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싫어하게 되기도 하고 싫어했던 것도 좋아하게 되기도 한다. 잘했던 것도 발전 없이 그 자리를 머물면 후퇴하기도 하고 부족했던 것도 부단히 노력하면 잘해지기도 한다. 그러니 나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100% 장담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건 '지금의 나'이지 않을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몇몇의 연애를 통해 우리는 확신에 찬 내 사랑이 얼마나 쉽게 깨져버리는지 깨닫곤 한다. '사랑해'라는 말은 순간의 진심일 뿐 영원히 변치 않을 마음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때 정말 소중해서 영원히 함께 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도 결국 남이 된다. 그러니 사실 나의 마음조차도 100%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확신은 그 순간의 의지나 감정일 뿐이다. 지금의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미래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나의 소망, 취향, 감정, 생각 정도일 것이다. 미래의 나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의 나는 이런 생각과 감정이 확고해!라고.
너에게는 맞고 나에게는 틀리다.
흔히 우리는 스스로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결정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어디까지나 자신의 기준에서 객관적인 것이니 진짜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스스로 논리가 통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논리로 이해되지 않으면 틀린 문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에게 자신의 논리만큼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없는 거다. 그건 어쩌면 합리주의자가 아니라 셀프-합리주의라고 말하는 게 맞지 않나?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렇다. 스스로의 논리에 부합되지 않는 일들은 틀린 일, 잘못된 일이라고 확신에 차 상대를 매도하곤 한다. 어디까지나 나만의 논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객관적인 시선이야말로 정의롭고 올바른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스스로 객관적으로 생각해서 장담한 것 또한 어쩌면 그 순간에 자신의 신념, 이념 안에서 스스로 객관적이라고 평가하며 내린 순간의 의사결정일 것이다. 그 생각이 너에게는 맞지만 나에게는 틀릴 수 있다.
객관성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말이야. 넌 객관적이지 못해'라는 말을 보면 누가 떠오르는가. 바로 '꼰대'다. 객관성은 사회 보편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과연 세상에 그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모두가 하나의 생각으로 보아야만 가능하다. 이런 세상은 왕을 신으로 보았던 시대에서나 있는 일이다. 내가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내 말이 법이고 내가 왕이라는 것과 같다.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객관적인 점을 찾아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문제를 보고 사는 것이다.
[야근이 사라지는 문제 해결의 기술] 中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인생
서퍼가 바다의 흐름을 예상하며 파도를 타는 게 아니라 그저 파도의 흐름에 맞춰 유연하게 파도를 타듯 우리도 그때그때 환경의 변화에 맞춰 조금씩 변할 수밖에 없다. 불과 3개월 전만 떠올려봐도 지금과 나는 많이 달라졌다. 회사에서는 팀과 상사가 바뀌었고 연인과 헤어졌고 작은 모임을 주도하고 있고 새로운 인생의 방향표를 세우고 있다. 3개월 전까지만 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자의, 타의로 수많은 변화가 생겨나니 나도 그에 맞춰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금의 내가 희망하는 도착지가 어딘지 생각하되 그 도착지에 무조건 미래의 내가 가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중간에 어떤 연유로 내 목적지가 완전히 달라질지도 모른다. 어디서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니깐 인생이 오히려 더 재밌다. 이렇게 나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내려놓고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실망도 혼란도 없다.
미래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장담하지 말고 꿈꿔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