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eter Kim Dec 23. 2017

항상 양보하는게 잘하는 걸까요?

뽀로로를 이렇게 열심히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뽀르노로 읽었다면 당신은 음란마귀!)

아이를 키우다 보니 많은 애니메이션을 보게 된다. 그 중 당연히 포함되는 애니메이션이 바로 뽀통령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 뽀로로다. 처음에는 아이가 조르거나 내가 너무 힘겨울 때 가끔씩 쉬고 싶은 마음에 뽀로로를 틀어 줬다. 아이에게 늦은 나이까지 절대 TV나 동영상을 안보여주는 부모도 있지만, 난 그정도의 인내심은 없다. 이상하게도 아이와 함께 에피소드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빠져들어 같이 보고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게 바로 뽀로로의 인기의 비결인가 싶기도 하다. 서른이 넘은 어른도 사로잡는 마력!


뽀로로의 주요 등장 인물은 뽀로로, 크롱, 에디, 패티, 해리, 포비다. 대부분 뽀로로, 크롱이 에피소드를 주도해가는데 이야기 하고자 하는 에피소드에선 포비가 주인공이었다. 뽀로로를 모르는 분을 위해서(나도 예전엔 1도 관심 없었으니) 포비란 캐릭터를 간략히 설명드리면 포비는 덩치가 크고 순진한 북금곰이다. 뽀로로에 나오는 주요 캐릭터 중 가장 크고 힘도 세다. 대개 덩치가 큰 캐릭터가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고 군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친구는 항상 자신을 희생하며 배려심이 너무 깊다. (깊어도 너무 깊다!)

이 친구가 포비다!


에피소드로 잠시 들어가 보자.

놀이터에 그네가 두 개 있는데, 친구들이 이미 두 개의 그네를 모두 타고 있다. 포비는 신나게 놀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자기도 너무 그네가 타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때 마침 한 친구가 그네에서 내려 다른대로 가버린다. 한자리가 빈 그네로 포비가 걸어가는데, 크롱이 서둘러 달려오며 그네를 타고 싶어한다. 포비는 원래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듯이 크롱에게 그네를 양보하고 심지어 밀어주기도 한다.

이번엔 루피의 집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앞서 말한대로 포비는 덩치가 크다. 이는 몸을 유지하기 위해 많이 먹어야 한 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침 식탁에 샌드위치가 여러개 놓여있다. 배고픈 포비는 다른 친구들을 밀어내며 가장 먼저 샌드위치를 집어 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기는 커녕 다른 친구들이 다 집어들 때 까지 기다린다. 친구들이 다 집은 후에 하나 남은 샌드위치를 집으려는 순간 다른 친구가 마지막 남은 하나를 냉큼 가져가 버린다. 화를 내며 돌려달라고 할 법도 한데, 포비는 아무말 없이 슬그머니 또 양보하고 말았다. (아! 이 순진무구한 북극곰 친구를 어찌할꼬!)


아무 생각 없이 포비를 바라보다 문득 항상 이렇게 양보하는 삶이 잘 사는 삶일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물론 어린시절 부터 바른생활/도덕/윤리 시간을 통해 우린 양보하며 살아야 한다고 배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서로 양보하며 살아간 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사회일까? 오히려 현실은 그와 반대다. 기를 쓰고 더 가지려고 하지, 양보하는 사람은 드물다. 좋아하는 저자 중 애덤그랜트라는 와튼 스쿨 교수가 있다. 이 사람이 <기브앤테이크>라는 책을 출간해서 읽어보았다. 그랜트는 사람들을 크게 세가지 부류로 분류하고 있다. 기버(Giver)와 테이커(Taker)와 매처(Matcher). 기버는 받는 것보다 더 많이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 테이커는 준 것보다 더 많이 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말한다. 매처는 받은 만큼 주고, 준 만큼 받는 사람. 그랜트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성공의 높은 자리에 올랐을지 추적을 했는데, 결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기버들이 였다고 한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 중 하나는 성공이란 사다리에 가장 밑에 있는 사람들도 기버였다는 점.) 어떤 기버는 사다리의 위로 오르고 어떤 기버는 그렇지 못했다. 왜 그럴까?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을 추적하며 관찰을 지속한 결과 성공을 거둔 기버는 단순히 동료보다 더 이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상대에 따라 조건적으로 대응을 한 기버들이 성공의 사다리 위를 차지했다. 그에 반해 무조건적인 사랑의 기버는 끝없는 인내와 베품으로 자기 자신의 에너지가 고갈 되어 바닥으로 가라 앉았다.


항상 양보하는 것이 미덕이던 시대는 갔다. 양보만 하던 포비를 다른 친구들은 안쓰럽게 또는 감사하게 생각 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랬다면 포비에게 다음에 먼저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그런 일들은 옛날 옛적 전래 동화에서만 일어난다. 사랑과 헌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요구를 불러올 뿐이다. 물론 양보하고 먼저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선인 사회에서 나는 살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무조건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상대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아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포비를 보면서 스스로 포비같이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한아이 컴플렉스에 빠져서 살아왔던 건 아닐지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인식되고 싶어서 부단히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 외부에서 주는 인정을 먹고 하루하루 살았다. 그렇게 외부에서 규정한 나란 이미지에 갇혀서 그 틀에 실제 나를 어거지로 끼워 맞추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결국 이런 삶은 유지되기 어렵다. 엄청남 에너지 소진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다시 뽀로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포비는 그렇게 양보만 하며 행복했을까? 다른 친구들은 포비의 양보로 인해 행복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친절이 반복되면 이내 권리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 아닌가....

나는 여전히 양보가 미덕인 사회를 꿈꾼다.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 하지만 이 양보가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면 난 그런 양보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 지하철 역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