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을 읽었다. 다른건 기억에 남는게 없지만 딱 하나 기억에 남는게 있다. 책에서 저자는 고전을 '말린 것'으로, 유행하는 신간들을 '날 것'으로 비유하면서, 어떤 것에 치우치기보다는 말린 것과 날 것을 균형 있게 섭취해야(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뻔한 얘기다. 그럼에도 이 책을 언급한 이유는 책의 말미에 추천해둔 5권의 말린 것들(고전)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로빈슨 크루소]였다. 마침 사둔 세계문학선에 이 책이 있어 다시 읽었다.
꼬꼬마 시절 로빈슨 크루소를 재미나게 읽었던 기억으로 책을 펼쳤는데, 두께가 300페이지에 이를 정도로 두꺼웠다. 없었던 일처럼 책을 살포시 덮을까 하다 심호흡 한번 쉬고 읽기 시작했다. 초반부는 안정된 정석의 길로 가길 바라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바다로 떠나려고만 하는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부모가 되어 이 부분을 읽으니 부모의 마음이 일견 이해되긴 한다. 세상의 쓴맛 단맛 다 경험한 어른의 시각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자식이 덜 고생할지, 더 잘 살 수 있을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꼰대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으로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는 거겠지만, 사실 세상이 너무 변하고 있어 그 길이 올바른 길이라고 보긴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뭐 겪어보지 못하면 깨달음도 없는 법. 결국 로빈슨 크루소는 바다로 나가서 개고생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고생하며 '아.. 그렇게 만류하신 아버지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 고생은 안 하고 있을 텐데..'라고 깨우친 듯했으나, 더 큰 세상에서 거대한 자극을 경험한 로빈슨 크루소에게 정착 생활은 시시했다. 결국 방랑벽을 이기지 못하고 또다시 뱃여행을 떠난다. 사랑과 호기심은 말리려야 말릴 수 없는 법이다. 모험이 성공적이면 좋겠지만 로빈슨 크루소 일행은 바다에서 해적을 만나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 힘들게 노예생활을 하면서 또다시 편안한 집을 떠나올 걸 후회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해도 부질없는 일이다. 과거에 돌아가 어느것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노예생활을 성실히 하며 주인에게 얻은 신임을 무기로 로빈슨 크루소는 간신히 배로 탈출했다. 이쯤에서 고생도 끝나면 좋으련만 바다로 시작된 호기심은 큰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며 절정을 이룬다.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죽고 로빈슨 크루소는 홀로 무인도에서 눈을 뜨게 된다. 사실 무인도에서의 생존기가 이 책의 대부분의 지면을 차지한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28년을 무인도에서 살았으니 생의 30%는 거기서 보낸 것이다. 사람이라곤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무인도에서 살아가기 위해 고생고생을 해나가는 로빈슨 크루소를 보며 이러한 생의 의지는 어디서부터 올까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결국은 죽음을 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억척스럽게 그리고 때론 만족하며 삶을 이어나간다.
로빈슨 크루소의 무인도에서의 삶을 곱씹으며 든 생각은 그의 빠른 현실 자각과 적응력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종종 우리는 내가 어떤 현실(상황) 가운데 서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것만 잘 생각해도 많은 문제들이 쉽게 풀리고 하고자 하는 결정이 수월할 수 있다. 로빈슨 크루소는 현실인식이 빨랐다. 무인도에 떨어졌을 때 본인이 처한 상황을 빨리 인식하고 적응할 준비를 시작했다. 적응력 또한 민첩했다. 무인도에서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여 삶을 이어갈 준비를 해나갔다. 사나운 동물들로 부터 자신의 목숨을 보호할 견고한 집을 구축하고, 이 생활이 짧게 끝나지 않을 걸 수용하며 곡식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무인도에서 생활할 옷을 사냥한 동물의 가죽과 털로 직접 만들어 입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주목했던 부분은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배가 난파되어 동료들이 모두 죽고 혼자 무인도에 떠밀려와 눈을 떴을 때 로빈슨 크루소는 두려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께 감사했다. 적어도 자신은 죽지 않고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은 그의 무인도 생활 곳곳에서 드러난다. 어쩌면 이 마음이 그의 생을 이어가는 의지를 견인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성인이 되어 다시 읽은 로빈슨 크루소는 단순한 무인도 생존기가 아니었다. 그의 생을 통해 읽는 사람마다 달리 느껴지는 그 무엇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에서도 이 책을 꼭 읽어봐야 할 고전 중 한 책으로 꼽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하루 5분 일기를 쓰며 지금 이 순간 감사한 일 3가지를 쓰고 있다. 매일 쓰다 보니 어떤 땐 감사한 일로 적을 거리가 없다. 그럴 땐 (읽었던 책에서 조언한 대로) 가까이에 있거나 눈에 보이는 단순한 것들에 감사한다. 화창한 날씨나 신선한 공기, 어깨에 딱 맞는 가방 이런 소소한 것들이다. 뭐 그런 것에까지 감사를 해야 하냐 할 수 있지만, 감사하는 마음은 훈련이다. 평소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불현듯 위기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 리 만무하다. 직장생활은 전쟁이고 그 마저 나오면 지옥이라고 하는데, 그 지옥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힌트를 로빈슨 크루소를 읽으며 얻었다.
정확한 현실 자각, 빠른 적응력, 감사하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