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왜 말하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왜 사는가'라고 자문해 보면, 결국 말하기 위해 산다고 할 수 있다. 인생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을 누군가는 그림으로 또 누군가는 노래로 말한다. 때론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살아가는 침묵으로 말하고, 속절없이 쓰러지는 죽음으로 말하며, 명품으로 뒤덮인 겉치레로, 을병이를 억누르는 힘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사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왜 말하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말에는 우리의 의지가 서려있다. 의지에는 삶의 목적이, 삶의 목적에는 존재의 이유가 숨어있다. 결국 우리는 말을 통해 우리의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려고 하는 거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정희진은 “작가는 지배하기 위해 쓴다”란 칼럼에서 김훈, 정찬, 차학경의 문장을 소개하며 이런 언어가 나올 때까지 작가는 ‘가혹한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견 옳다. 하지만 ‘가혹한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건 작가뿐일까?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을 통해 말하기 위해 그 ‘가혹한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이 감당함의 형태는 자주 고개를 숙임으로, 주장을 꺾음으로, 무릎을 꿇음으로, 자신을 부정함으로 나타난다. 어떤 고통이 더 괴로울까를 상상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상대적이다.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정희진은 이청준의 <예언자> 한 구절인 '작가는 지배하기 위해 쓴다’를 인용하며, 조화롭고 창조적인 지배, 화해하는 지배를 언급했다. 조화, 화해, 지배 도통 무얼 말하려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덧붙인 말은 이해했다. 이 지배는 마음대로 되지 않고, 대개는 작가의 패배로 끝난다는 말. 이 역시 인생에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하다. 여러 형태로 드러나는 우리의 말은 대개는 패배로 끝난다. 들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고 말하려고 하는 사람만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늘 패배자일 수밖에 없다.
왜 들으려 하지 않고, 말하려고 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