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읽기: 더 글로리
드라마 ‘더 글로리’가 사회적 이슈가 되는 상황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원한과 분노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근, 현대사를 열거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알게 모르게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자연, 국가, 기업, 가족, 지인 등에게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사람들의 일 년 유병율이 2016년 기준 전체 인구의 0.5%였다. 한국 인구를 5천만 명으로 가정할 때, 한 해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경험한 사람이 25만 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개인들이 경험한 심리적 피해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장기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는 마땅한 치유의 방법을 찾지 못하거나 찾을 수 없는데 원인이 있다. 혹은 방치되거나 외면되는 상황으로 빚어진다. 사고나 사건의 발생을 막지는 못해도, 그 피해를 최소화시키고 재발되지 않는 장치는 마련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법적 장치의 보완은 중요한 일임에 분명하다. 피해자들이 조금이나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치유의 시간을 갖게 하는 일도 병행되어야 한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없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적인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으며 사회적 관점의 검토와 공감대 형성도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학교 폭력은 개인적인 문제로 간주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예민한 분야이다 보니, 공개적이 아닌 방식이 주로 선택되었다. 학생의 보호라는 명분하에 비공개적으로 다루는 문제다 보니, 부적절한 개입과 관행으로 축소 처리된 사례가 있었다.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의 피해를 입고도, 어쩔 수 없이 학교를 떠나야 했던 피해자가 긴 시간의 준비 끝에 마침내 복수를 한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는 말이 있듯, 복수는 복수의 씨앗을 낳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복수가 아닌 용서를 선택해야 한다는 가치관도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찾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용서가 최선의 방법일까? 모든 피해자들이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현시대의 정서는 용서를 답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되풀이되는 악행의 고리를 끊기 위한 응징, 복수가 필요하다는 관점이 용서의 대안으로 등장했다.
학교 폭력에 관여했던 연예인이나 유명인사들이 학폭 사실이 공개되면서 더 이상 공인 활동을 못하게 된 사례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마치 피해자는 가해자가 셀럽이 될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가, 정상에서 추락시키는 복수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이었다. 만일 그 해석이 사실이라면, 그런 일들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응징의 정서가 이미 우리 사회에 형성되었다는 반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앞서 공개되었던 파트 1에서 복수를 준비하는 주인공 문동은(송혜교 분)의 다음 행보를 확인하고 싶었다. 드디어 파트 2도 넷플릭스에 공개되었고, 본격적으로 그녀의 복수가 진행되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를 하는 이야기지만, 이 드라마의 묘미는 복수 자체라기보다는 복수의 과정과 방법에 있었다. 복수를 다루는 드라마인 만큼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흐름이 있으리라 예상하며 시청했지만, 지속적으로 시청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복수의 과정과 방법이었다. 주인공은 자신이 당한 고통, 좌절, 슬픔, 배신, 분노 등 모든 것을 박연진(임지연 분)과 일당들도 똑같이 겪게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하늘이 권선징악을 이루어 줄리는 없다. 주인공은 스스로 준비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하늘이 그녀를 도왔고, 권선징악이 이루어졌다.
‘더 글로리’가 많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고, 사회적 이슈가 된 계기를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작가 김은숙의 탁월한 각본을 짚어야 한다. 등장인물들이 하는 대사들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드라마 속 다양한 상황들에 이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말들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연진아~”로 시작하는 문동은의 독백은 각종 대중매체에서 패러디될 정도로 회자되고 있다. 작가의 탁월함은 대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작가의 진정한 고민은 복수의 과정과 방법에서 돋보였다.
복수의 과정은 통쾌함을 주는 일차원적 과정이 아니었다. 현실적 복수답게 문동은과 박여진이 서로 피해를 주고받는 치열한 전투였다. 사건의 전개가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내는 과정이라 극적 긴장감을 유지시키며 이끌었다. 피해자의 복수는 일방적이며 압도적인 승리가 아니었다. 치열한 공방전으로 피투성이가 되는 전투를 겪고서 얻어낸 승리였다.
다음은 복수의 방법이었다. 작가의 큰 고민은 주인공이 복수를 하지만, 그녀의 복수가 또 다른 복수의 씨앗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복수의 완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수의 방법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받았던 고통을 단순히 똑같이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피해자가 직접적으로 고통을 주고 위해를 가하는 방법도 아니어야 했다.
복수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가해자와 똑같은 사람이 되면 안 되었다. 작가도 주인공이 그렇게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복수의 씨앗이 없는 방식이 이어야만 했다. 작가가 찾은 방법은 가해자의 자멸을 유도하는 방법이었다. 가해자가 감춰 둔 채 살았던 악의 본성을 스스로 꺼내 들게 만들면 가능했다. 그래서 복수의 과정은 더 힘들고 난이도가 높았다. 그 어려운 일을 마침내 동은이가 해냈다.
둘째, 배우들의 연기력이었다. 주인공 송혜교의 무표정, 무감정 연기가 돋보였다. 두려움에 떨던 어린 피해자에서 벗어나,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인물의 면모는 시청자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매일매일 복수를 다짐하며 사사로운 행복의 느낌을 외면한 채,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이 어떤지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은의 엄마가 행한 배신과 위협에 대해서는 억압할 수 없는 감정을 표출했다. 그리고 그것을 해소시킬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은 무섭게 자연스러웠다.
악역을 맡았던 여배우들 임지연, 김히어라, 차주영 등의 연기가 맛깔스러웠다. 학폭을 저지른 인물답게 내뱉는 욕설들과 표정이 리얼했다. 드라마가 긴 호흡으로 복수의 의지를 유지시키고, 시청자가 문동은의 계획에 동조하고 지지할 수 있게 만든 결정적인 힘은 악역들의 공이었다. 도저히 바뀌지 않는 악인들의 언행은 주인공의 계획을 합리화시켜 주었다.
이들은 누군가를 괴롭히고 배신한 경험이 있으며, 일상에서 배신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사람들답게 무너져갔다. 마치 도미노가 하나씩 넘어가면서, 결국에는 가장 커다란 도미노가 무너지듯이 말이다. 작은 복수에서 큰 복수로 차츰차츰 수위가 높아지는 과정에서 연진이 일당의 연기력은 결정적인 효과를 만들어냈다.
샛째, 감독의 경험이었다. 의도한 바이럴은 아니었을 텐데, 마케팅적으로 볼 때 흥행을 촉진시킨 계기가 되었다. 드라마 파트 2가 개봉된 이후 감독 안길호의 학폭 의혹이 재기되었던 것이다. 그를 비난하는 시청자들은 학폭 가해자의 연출이라 현실감이 넘쳤던 것 같다는 평을 내놓으며 그를 비난했었다. 그는 학폭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감독조차도 학폭의 가해 사실에 대한 복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감독은 미스터리 추리를 다루었던 드라마 ‘비밀의 숲’으로 흥행을 일으킨 경험이 있었다. 사건을 추적하며, 그 인과관계를 명확히 규명하며 죄인을 처벌하는 방식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익숙한 감독이라 할 수 있다. 단지 과거 학폭의 경험으로 흥행작을 만들었다고 볼 수 없는 대목이다.
마지막은 학교 폭력에 관심 있고 관련 있는 시청자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는 학폭의 피해 여부를 떠나, 그런 상황을 보고 듣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본인의 문제는 아니지만, 자녀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이기에 학부모들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이런 폭력에 대한 분노와 대안에 대한 갈증이 깊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상황으로 이해해야 한다. 단순히 학교 폭력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 드라마를 본 시청자는 얼마 없을 것이다. 공감을 통해 치유를 원하는 시청자가 더 많았던 것이다.
대중문화의 힘은 대중의 생각이 표현되고 공유되는 과정을 통해, 사회가 긍정적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대중의 사회적 문제제기와 참여는 민주주의 국가의 초석이다.
이 드라마를 계기로 우리나라가 학폭이 근절된 사회로 한걸음 나아가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