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읽기: 스즈메의 문단속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2시간 넘게 집중해서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이미 300만 명이 극장에서 이 작품을 보았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에 대한 신뢰와 신작에 대한 기대감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는 국내에서 ‘너의 이름은’으로 380만 관객을 극장에 불러들인 경험이 있었다. 그 작품은 국내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가운데 최고 흥행작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만일 세상을 구하는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영웅(hero/heroine)이라고 칭한다. 이번 작품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구해준 영웅의 이야기이다. 대중문화계에서 영웅 이야기는 DC Comics와 Marvel Comics의 만화와 영화가 주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DC의 슈퍼맨, 베트맨, 원더우먼 그리고 Marvel의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엑스맨 등은 각각 디씨 유니버스와 마블 유니버스에서 활약하는 영웅들이다. 그들은 대체로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일상을 살다가 세상에 위기가 닥치면 변신하여 등장했다. 그리고 세상의 위기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들의 활약을 세상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위기가 생기면 그들이 나타나 세상을 구해줄 거라는 믿음이 저변에 깔려 있다. 미국 스타일의 영웅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대체로 그러했다.
그러나 ‘스즈메의 문단속’은 영웅을 다루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영웅의 정의와 활약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 설정은 DC나 Marvel과 매우 달랐다.
첫 번째 차이점은 영웅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영웅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국가나 사회가 존폐의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영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는 듯 보여서, 사람들은 영웅이 필요하다는 인식조차 없었다. 작품 속 영웅은 남들 모르게 세상을 구하는 사람이다. 저승에서 이승으로 넘어 들어오는 정체 모를 에너지(지진)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믿기 어려운 수준을 넘어, 비과학적 현상이라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위기를 해결하는 영웅이지만 자신의 활약을 마땅히 설명하기도 납득시키기도 어렵다.
두 번째 차이점은 DC와 Marvel 영웅들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능력, 신체적 조건 등이 이 작품의 영웅에게는 없다는 점이다. 능력이 있다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저승의 에너지를 보는 능력이다. 그 능력이 사건을 감지하고 사건 해결을 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란 것은 맞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신체적 조건이나 막강한 파워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가진 능력을 사용할 뿐이었다. 상대해야 할 대상에 비해 지나치게 평범한 능력이 영웅의 한계가 되다 보니, 사건의 극적 긴장감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모르면 형성되지 않지만, 한계를 조금만 알면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것이 사람의 긴장감이다.
세 번째 차이점은 세상의 위기를 구하는 방식도 색다르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영웅이 하는 일은 저승과 이승을 잊는 문을 제대로 단속하는 일이다. 문단속이란 단어가 주는 의미도 그렇고, 그 일 자체도 거창한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상적인 일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러다 보니 DC와 Marvel 영웅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박한 영웅처럼 느껴진다. 작품에서 문단속을 하는 일이 매우 위험하고 목숨을 걸어야 할 용기 필요한 일처럼 묘사되지만, 그 행위가 소소한 일상의 범주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네 번째 차이점은 영웅과 빌런의 결투, 흔히 알 수 있는 선과 악의 구도가 아니란 점이다. 이 작품 속 영웅은 악을 무찌르고 선을 지키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생과 사의 자연적 현상과 이치를 상대하는 것이다. ‘천지불인’이란 말이 있다. 자연적 현상에는 어짊이 없다는 뜻으로, 그 안에는 선과 악의 가치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어떤 사건은 자연의 법칙과 순리에 의해 단지 발생할 뿐이다. 안타깝게도 자연발생적 사건이 사람에게 치명적 재난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빌런의 행위가 재난의 원인이라면, 차라리 해결하기 수월할지 모른다. 불행이 닥치지 않도록 불가항력 존재와 싸워야 하는 일은 상상외로 힘들다. 아니 아직까진 불가능하다.
이 작품에는 어떤 부귀영화도 누릴 수 없이 소임을 다하며 살아가는 영웅이 등장한다. 그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일을 하며, 피해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기억해 줌으로써 치유한다. 그런 관점에 보면, 이 작품의 주제는 ‘치유’이다.
사람의 삶이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로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시간 속에서 과거에 얽매인 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상처, 고통, 아픔이 오늘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 일본은 지진이 자주 발생하다 보니, 지진은 일본인이 사는 현재를 과거에 얽매이게 만들고 있었다. 지진은 무의식적으로 뿌리내린 공포의 대상이며, 사회적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지진이란 물리적 현상만을 뜻하진 않았다. 지진은 생활의 터전을 모두 빼앗아 버리는 자연현상일 뿐 아니라, 생활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의 삶 자체까지 무너뜨리는 심리적 현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갑자기 가족이나 친구를 잃는 극한 상실감을 겪기 때문이다.
결국 상실을 통해 역설적으로 일상의 소중함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일상의 회복, 사회가 스스로 치유하는 법을 찾아야 한다. 마치 방치하고 버려두면 더 큰 재앙이 일어날 수 있으니, 그곳을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찾자고 제안한 것이다.
끝으로 최근에 개봉된 그의 작품들에 사용된 몇 가지 공통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것들은 흥행 공식처럼 그의 작품들에 투영되어 있는 것들이다.
첫째, 주인공은 소녀이다.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에 이어 이번 작품도 주인공은 소녀였다. 소녀는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 자신에게 솔직한 선택을 했다. 첫눈에 반한 사람을 찾아가 만나고 인연을 만들었다. 스즈메가 소타를 처음 만난 순간은 우연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선택이 그 우연을 운명이 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그녀는 영웅이 되어 세상을 구하는 모험을 시작했다.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까지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되었다.
둘째, 주인공이 가진 신비한 재능이다. 누구에게나 재능은 있고, 사실 재능에는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재능이란 사회적 관계에 의해 상대적인 가치가 부여될 뿐이다. 특정 시대와 장소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재능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인정을 받고 산다. 만일 사람들이 관심 없어하는 재능이면, 재능 때문에 외면당하며 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본인이 남들과 다른 재능이 있음을 자각하는 일은 큰 두려움을 자아낸다. 더군다나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재능이라면 더더구나 그렇다. 스즈메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재능을 인정했다.
셋째, 배경은 현실 세계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하늘과 구름, 노을과 별, 비와 바람, 푸른 초원 같은 자연과 기상변화를 그의 작품 속에서 사실적이면서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가 다루는 인물도 현실 공간에 사는 현실적 인물을 캐릭터로 만들었다. 이런 점들이 애니메이션이지만 허구적 이야기가 아닌, 개연성이 충분한 영화처럼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이 갖는 장점도 구현했다. 실사 영화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림이기에 가능한 상상의 세계까지 제대로 보여준 것이다.
넷째, 현실과 이상의 미학적 결합이다. 현실 배경과 가상 존재의 결합은 이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고 가게 만든다. 그의 주요 작품들 가운데 배경이 되었던 장소들은 신카이 마코토 마니아의 순례 코스가 되기도 했다. 현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장소들을 방문해서 작품 속 인물들과 사건을 떠올리는 순간, 마니아들은 이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미학적 경험을 하게 된다. 그가 미치는 영향은 영화 산업을 넘어 관광 및 문화산업까지 확산되고 있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사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사랑스럽게 써 내려간 그림 동화였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영웅이라고 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마음의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면, 우리는 영웅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