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미분한 날갯짓, 영화 벌새(House of hummingbird)
+ 영화를 관람 후 나누는 이야기를 상정하였습니다.
그들이 후회하고 있을까? 미안해할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강퍅한 요구가 아니라고 해도 이러한 질문에 다다르기까지는 시간과 과거에 대한 응시가 필요하다. 이 의문을 가진 영화의 등장인물들도 다르지 않다.
벌새는 칼새 목 벌새과의 동물로 1초에 19-90번의 날갯짓을 한다. 알래스카와 열대지방이라는 대조적 환경에서 두루 서식하는 이 조그마한 새는 한번 목격하면 잊을 수가 없다. 유선형의 아름다운 형태 하며 해 질 녘에 활동하는 습성과 어울리는 깃털의 오묘한 빛깔, 무엇보다 인간은 구현할 수 없는 속도로 날갯짓을 하는 모습에 시선을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치 시간을 멈추고 있는 것 같다. 그 벌새는, 적어도 자신 주위의.
벌새가 이 영화의 어떤 징표인지 분석하려 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인간적인(인간 위주의) 접근이다. 외려 주인공 은희(박지후 배우)가 존재하고 회상되는 방식 전체가 벌새답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자신의 집이 아닌 아래층 동일 아파트 라인의 호수에 찾아가서 문을 열어달라 애원하는 은희는 단도직입 말한다. 이제부터 엊그제 한국의, 가족을 살아온, 어떤 영혼을 이야기할 거야.
한국의 가족을 물질로 대상화한다면 ‘아파트’보다 적합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본래는 규격화되고 보편화된 집단 수용의 시설인데 신격화된 투기의 대상. 한국의 가장이 회식 자리에서 야유회에서 목놓아 부르며 일탈을 꿈꾸던 아파트(80년대 국민가요 윤수일의 '아파트' 가사 참조). 은희 역시 교육을 통한 기득권 이양의 성지라는 대치동 방 3개 20평대 협소한 공간에서 다섯 식구가 사는 아파트 상가 떡집의 막내딸이다. 아마도 강남불패의 신화가 공고해지기 이전에 흘러들었거나 세를 들었을 이 가족은 자원은 궁핍하되 체면은 차려야 하는(동네 창피한 일은 하면 안 되는) 일상에서 각자 어긋나고 있다.
저런 애들은 커서 우리들 파출부가 될 거야
라는 말 같은 것을 중학생이 스스로 생각해내거나 따라 하게 하는 사회는 어떤 곳인지에 대한 의문을 곰곰 뜯어보기도 전에 은희의 삶은 자연스레 빛나고 있다. 연애를 하고 친구와 콜라텍을 가고 담배를 피우고 문방구에서 펜을 훔치는 은희를 우리는 흔히 문제아, 비행청소년이라 편리하게 칭해 ‘버렸는데’ 어쩐지 은희가 이상하지도 밉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이미 그의 맥락에 올라타버렸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공공연한 폄하를 듣는 것 외에도 춤바람이 난 아빠의 외도와 가정폭력, 오빠의 학대에 노출되어 있다. 그럼에도 반동은 집 밖에서, 학교 밖에서만 일어난다.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을 가지지 못한 아이들의 삶의 무대는 더욱 자연스럽게 그 이외의 세상이 된다. 알다시피 그 세상은 거대하고 거칠고 냉혹하다.
은희와 목도한 세계를 벌새의 날갯짓처럼 진동하며 미분하는 동력은 영화가 사용하는 특수한 장치(성수대교 붕괴)에 의존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작품 안에서 우리가 은희가 된 이후부터 어떤 특정 사건보다도 그의 내면이 훨씬 더 큰 모집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어찌 이리 쉬울까, 연출 기법이 세련되어서일까, 모두가 태풍이 몰아치던 그 시기를 지나와 현재가 되었기 때문인가.
얼굴을 아는 사람은 수많은데
마음을 아는 이는 누구인가
이러한 잠언처럼 작용하는 힘과 결핍된 영양소와 같은 정신적 토양을 제공하는 적재적소 인물로서의 한문 선생님 영지(김새벽 배우)의 존재는 미혹한 인간인 부모나 형제, 친구 이상의 무엇이 고양된 영혼에게 필요함을 시사한다. 실은 절실하다. 지리한 생의 여로에서 찰나와 같을 몇 개월의 순간에 은희가 접촉했던 다른 차원이 이후 그의 삶을 변이케했을 것임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한다.
하나의 새 영혼이 돋아나 살아가는데 그 흙이 척박했어도 어딘가에는 빛과 오아시스와 다정한 공기가 있었다.
들여다보지 않았다 해서
현재의 그녀가 되기까지
유구한 역사가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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