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옷이 아닙니다. 옷은 패션적입니다.
"패션은 우리 사회를 조종한다”
<패션의 제국>, 질 리포베츠키
패션을 공부하면서 느낀 건 패션은 옷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사실입니다. 패션과 옷이 같았으면 같은 말로 쓰였겠죠. 그런데 저를 포함한 사람들은 트렌디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 패션리더라고 말하고, 멋진 옷을 입거나 독특한 스타일로 꾸미면 '패션 끝내준다'라고 합니다. 옷 전시회를 패션 컬렉션이라 말하고 의류 브랜드를 패션 브랜드라고 부르죠. 일상 대화에서는 패션은 옷이고 옷은 패션인 듯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공부하면 패션과 옷은 다르다는 걸 알게 됩니다. 패션의 어원은 라틴어 팩티오(factio)입니다. 팩티오는 활동하는 것,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패션의 어원으로 보면 패션은 활동하고 만드는 것들 혹은 그것들에게 보이는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패션은 옷이 아닙니다. 패션은 전체 집합이고 옷은 패션안에 속해있는 여집합입니다. 옷은 패션적이라는 말이죠.
대학교 때 배운 패션개념과 패션 책을 공부하면서 제가 느낀 것은 패션은 익숙해진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패션은 익숙해진 것을 새로운 것으로 변화시키는 흐름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패스트패션 브랜드 '자라'로 패션을 말해볼게요. 자라는 전 세계 매장을 통해서 사람들의 구매 데이터를 얻습니다. 데이터를 읽고 사람들의 구매 패턴을 파악해 가장 최신의 옷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빠르게 공급합니다. 자라는 1년에 2번 있는 패션 컬렉션 관습을 깨고 주 단위로 53번의 컬렉션을 선보입니다. 1-2주 단위로 새로운 옷들이 만들어지고 전에 만든 옷들은 다시 만들지 않습니다.(이래서 패스트 패션 브랜드이죠) 만든 옷들을 다시 만들지 않고 새로운 옷이 나오면 이전의 옷들은 트렌드가 아니게 됩니다. 최신의 옷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옷들은 물리적으로 낡지는 않았지만 마음에서 낡기 시작하죠. 심리적 마모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심리적 마모는 가속화되고 이전의 옷은 빠른 속도로 익숙해진 것이 됩니다. 자라는 사람들의 익숙함을 달래주는 새로운 옷을 곧바로 만들죠. 자라의 세계에서는 일주일마다 옷이 탄생하고 소멸합니다. 매주마다 새 옷을 만들고 이전 옷은 지루해집니다. 이를 반복합니다. 새로움과 익숙함의 무한 반복이죠. 이것이 패션이 작동하는 커다란 두 속성입니다.
패션은 새로움과 익숙함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작동합니다. 패션을 옷이라 하는 이유는 패션 현상을 일상에서 가장 쉽게 접하는 게 옷이기 때문입니다. 패션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기존의 것을 지루하게 만들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현대 사회 몇몇 영역은 패션의 작동원리로 움직이거나 패션의 힘을 받아 움직임이 활발해집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음악, 책, 미술, 영화 등 창작 활동을 요하는 영역들이 패션의 작동원리로 나아갑니다. 예를 들어, 대중음악에서는 2000년대 초중반에는 폭발적인 가창력을 내뿜는 가수의 음악이 유행이었는데, 지금은 힙합과 음색이 좋은 가수의 음악들을 자주 듣곤 하죠. 힙합 안에서도 라임과 비트가 최신의 것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취향에 따라 다양한 음악을 듣겠지만 폭발적인 가창력은 지나갔고 힙합이라는 새로운 즐거움이 주를 이루고 있죠.
앞서 말한 것처럼 패션은 새로움과 익숙함으로 움직입니다. 길거리에서 스키니진이 소멸하고 와이드 팬츠만 보이는 이유는 어떤 커다란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단순히 스키니진이 너무 익숙해지고 재미없어서 와이드 팬츠가 등장한 것입니다. 에디 슬리먼이 디올 옴므 2004 F/W 에서 스키니진을 들고 패션계에 충격을 주었을 때 너도나도 스키니진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샤넬의 디자이너였던 칼 라거펠트도 에디 슬리먼의 스키니를 입기 위해 1년을 넘게 40kg 이상 체중을 줄였죠. 그렇게 패션의 첨단에 서있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해 스키니진은 대중들로 길거리로 넘어왔습니다. 스키니진이 거리를 지배했고 대중은 그것에 열광했습니다. 하지만 매일 똑같은 옷을 입으면 싫증이 나서 다른 옷을 입거나 사는 것처럼, 스키니 팬츠의 유행이 극에 달했을 때 스키니진은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이때 등장한 게 와이드 팬츠였죠. 영원할 것 같았던 스키니 팬츠는 베트멍이 2014 F/W에 가져온 와이드 팬츠에 아주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2018년도부터 지금까지 길거리에 나서서 스키니진을 입은 사람을 보면 이질감이 느껴지거나 유행에 뒤쳐진 사람으로 느낍니다. 자신의 옷장도 확인해보면 알 것입니다. 스키니진이 없거나 있어도 한 번도 관심을 주지 않아 구석에 숨어있고 먼지가 쌓여다는 것을. 지금 길거리의 옷들은 대부분 커다랗습니다. 통이 큰 바지, 기장이 길어 땅에 닿아 밑단이 헤진 바지, 신체에 맞지 않는 커다란 재킷, 손을 덮은 커프스 셔츠. 스키니함이 원래 없었던 것 마냥 자취를 감췄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키니 팬츠가 지루함의 끝에 도달하여 사라졌던 것처럼 와이드 팬츠도 같은 방식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의상 사회심리 측면에서 봤을 때 유행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이유는 남들과 달라지고 싶어 하는 '차별'과 남들과 같아지고 싶어 하는 '모방' 때문입니다. 패션의 기원은 정확히 어떤 시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패션은 인간에게 '자의식'이 생겼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기가 중세 말 혹은 르네상스 시기입니다. 인간이 신에서 벗어나 거울을 보며 자기 자신을 의식했을 때부터 자아를 탐색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겼고 다른 사람은 이렇게 생겼다는 걸 확인하며 나와 타인 사이에 '다름'이라는 것을 발견했죠. 나는 타인과 다르기 때문에 타인과 다른 나다운 생각, 몸짓, 용모 등 정체성과 개성을 갖추면서 나와 타인을 구별 지을 것들이 필요했습니다. 타인과 구별을 짓고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인과 다른 '새로움'이 필요하죠. 다른 사람들이 쓰는 것들로는 나를 나답게 지키지 못합니다. 남들이 모르는 새로운 것, 나만 아는 것, 첨단 트렌드의 옷과 잡화, 힙한 것을 소비해 나를 지켜야 하죠.
가상의 셀레브리티(줄여서 셀럽이라 하겠습니다)를 만들어 좀 더 유행의 탄생과 소멸을 설명해볼게요. 패션의 첨단에 서있고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셀럽이 있습니다. 이 셀럽은 지구를 지배하고 모든 사람이 입는 스키니가 너무 싫증 났고 새로운 무엇이 필요했습니다. 셀럽은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패션에서는 앞서 있어야 하고 패션 세계를 견인해야 되기 때문이죠. 그때 등장한 게 와이드 스타일입니다. 새로움에 갈증이 난 셀럽은 와이드함으로 갈증을 해소하는 동시에 전 세계 몇십억 인구와 다른 '나'를 보여주었죠.
하지만 그때 뿐입니다. 유행은 전염성이 짙어 와이드 스타일은 한 사람이 소유할 수 없죠. 셀럽의 뒤에서 바라보는 사람들도 새로움에 갈증이 나있었고 셀럽이 입고 등장해 와이드라는 새로움에 열광합니다. 와이드 스타일은 급속도로 퍼져 나갑니다. 사람들은 셀렙을 모방하며 자신의 인간관계 안에서 다른 나를 보여주며 최신 트렌드를 뽐냅니다. 대중의 모방으로 그새 기존 와이드 스타일에 싫증난 셀럽은 또 다른 새로운 게 필요했습니다. 10년 넘게 질리도록 입은 스키니는 다시 입을 수는 없어서 기존 와이드 스타일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있어야 했죠. 그래서 셀럽은 면으로 만든 와이드 팬츠, 실크로 만든 와이드 팬츠, 인조섬유로 만든 와이드 팬츠, 블랙 컬러로 만든 와이드 팬츠, 찢어진 와이드 팬츠, 헤진 와이드 팬츠, 신체 활동의 불편함 끝에 서있는 와이드 팬츠, 길이가 긴 와이드 팬츠, 길이가 짧은 와이드 팬츠, 주름이 하나 접힌 와이드 팬츠, 주름이 두 개 접힌 와이드 팬츠 등 온갖 디자인의 와이드 팬츠를 소비하며 끊임없이 구별 짓기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금세 사람들은 셀럽을 따라 했습니다. 셀럽과 똑같이 온갖 와이드 팬츠를 사며 최신의 것들을 자신 있게 입고 다녔습니다. 이것이 유행의 작동 방식입니다.
“추한 것은 매력적이다. 추한 것은 흥분감을 준다. 왜냐하면 이것이 더 새롭기 때문이다.”
미우치아 프라다
미우치아 프라다가 했던 말처럼 현재 버버리, 드리스 반 노튼, 베트멍, 구찌 등 유수 브랜드들은 매력적인 추함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메가 트렌드인 어글리 패션이죠. 어글리 패션은 말 그대로 못생긴 패션입니다. 패션 업계는 조악하고 투박한 옷과 신발을 만들고 대중은 그것에 열광했습니다. 어글리 패션에서 가장 핫한 아이템은 바로 '어글리 슈즈'입니다. 발렌시아가의 어글리 슈즈'트리플 S'를 시작으로 구찌나 프라다 같은 정상급 브랜드들 뿐만 아니라 나이키, 아디다스, 아식스, 휠라 같은 스포츠 브랜드에서도 신발을 못생기게 만들었습니다. 둔탁하고 투박하며 어딘가 조악한 디자인으로 어글리 슈즈는 화려하게 길거리를 지배했죠. 또한, 골든 구스라는 신발 브랜드는 제조과정에서 애초에 신발을 더럽게 만듭니다. 빈티지스럽게 만드는 거죠. 어글리 패션과 다른 추한 매력으로 많은 사람이 골든구스를 신고 다녔고 여전히 길거리에서도 종종 보입니다. 어글리 패션, 어글리 슈즈, 더러운 신발이 유행하는 모습을 보면 패션의 미는 조화, 정비례, 황금 비율, 질서 같은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패션이 사람을 매혹하는 힘은 ‘낯섦’입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움마저 익숙해지면 지루함을 느낍니다. 예뻐서 산 옷도 결국 싫증 나죠. 어글리 슈즈가 아름다워 보이는 건 단순합니다. 새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움보다 새로움에 열광합니다. 우리가 입는 건 옷이 아닌 낯섦입니다.
"우리의 공통된 본성과 관습은 끊임없이 세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에요. 당신은 인간의 삶을 공격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사람과 민족을 무너트리죠. 반면에 저는 대개 수염, 머리 드레스, 의상, 가구, 집 등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만족해요. 이것은 사실이고, 저는 당신의 최고 행동과 비길 만한 일을 해요."
"I say then that our common nature and custom is to incessantly renew the world. You attack the life of man, and overthrow all people and nations from beginning to end; whereas I content myself for the most part with influencing beards, head-dresses, costumes, furniture, houses, and the like. It is true, I do some things comparable to your supreme action."
패션과 죽음 사이의 대화(Dialogue Fashion and Death), 패션이 죽음에게
패션과 죽음 사이의 대화(Dialogue Fashion amd Death)라는 책이 있습니다. 패션과 죽음을 의인화한 내용으로, 패션이라는 존재가 일이 많아 바쁜 죽음이라는 존재를 불러 세워 대화를 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패션은 죽음에게 당신은 나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죽음은 삶을 무너트리고 자신은 옷, 가구 등 변화하는 것들을 전복시킨다고 말합니다. 패션 세계에서는 기존의 것을 죽이는 게 관습입니다. 기존의 것을 죽여야 새로운 것이 소비되기 때문입니다.
강남스타일 말춤이 등장하고 나서 이전에 유행했던 춤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다음 해 컬렉션이 등장하면 올해 컬렉션은 뒤로 밀려났죠. 이렇게 패션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만들고 기존의 것을 지루하게 만드는 변화를 꾀해야 생존합니다. 이는 자본주의와 닮아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새로움을 향한 열망, 새로움을 획득하여 남들과 차별하는 구별 짓기 등 현대인의 욕망 메커니즘을 이용하여 지갑을 열게 합니다. 우리는 상품을 사는 게 아니고 상품이 주는 '새로움'을 사는 것이죠. 이미 기능이나 물리적으로 충족이 되는데 단순히 싫증이 나 소비하기 때문입니다.
계획적 진부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품을 계획적인 방법으로 물리적, 심리적 가치 효용을 낮추는 방식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소재나 부품의 정해진 수명에 의한 '물리적 마모', 소비 욕망을 자극하는 기호, 상징, 구별, 차별, 특별함을 불어넣어 지금 사용하고 있는 사물의 심리적 효용가치를 떨어트리는 심리적 마모가 있습니다. 패션에서 이 계획적 진부화로 새로운 것을 익숙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소비하게 만들게 합니다.
예를 들어, 패스트 패션 브랜드를 보면 물리적 마모와 심리적 마모를 동시에 일으켜 사람들의 지갑을 털어갑니다. 패스트 패션은 가격이 싼만큼 품질이 낮은 원재료로 옷을 만듭니다. 옷의 내구성이 다른 옷들보다 상대적으로 낮아 금방 헤지고, 한번 세탁하면 염색이 빠지거나 옷이 줄어듭니다. 옷을 못입게 되어 사람들은 그 옷들을 일회용품처럼 버리고 다시 일회용품처럼 소비합니다. 또한, 패스트 패션은 현대 소비주의에 걸맞게 움직이고 소비자의 은밀한 욕구를 자극합니다. 빅데이터로 소비자의 구매패턴을 파악하여 가장 최신의 옷을 만들고, 이전 옷들은 만들지 않아 다시는 사지 못한다는 소비 강박을 심어주며, 싸고 빨리 많이 만들어 소비자들에게 새로움을 얻는 쾌락을 보다 크게 선사합니다. 소비자들은 몸을 가리고 보호하는 필수적인 소비를 넘어 안 사고 못 배기는 필연적인 소비로 옷을 소비하는 거죠. 자본주의 시대에서 계획적 진부화는 상품 판매에서 중요한 전략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판매할 수 있는 모든 상품이 계획적 진부화 전략으로 판매가 되고 우리는 그것을 소비하죠. 계획적 진부화는 자본주의의 생존 수단이고 패션은 자본주의와 굉장히 밀접해 있습니다.
패션을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패션은 일상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패션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건 우리를 통제하고 극복할 수 없는 말같이 들립니다. 어떻게 보면 맞고 어떻게 보면 아닙니다. 패션은 우리 인간이 만들면서도 우리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패션 현상을 만드는 원인이고 패션을 통제하는 듯 하지만 인간이 자본주의를 만들고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패션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인공 구름을 땅에서부터 만들고 인공 구름이 온 지구를 덮고 이 현상을 어찌할 수 없는 풍경입니다.(시각적 비유가 적절한가요?...)
대중뿐만 아니라 패션 현상은 유행을 거부하는 소수의 집단에게도 유효합니다. 획일화된 가치관과 유행을 거부한 히피족, 고스족 등 소수의 스타일을 만든 집단도 그들 안에서 새로움과 지루함이 일어나고 남들과 다른 나를 만들기 위해 구별 짓기를 합니다. 컬러를 바꾼다든지, 액세서리를 추가한다든지 작은 디테일에서 구별 짓기를 할 것입니다. 이미 기성의 것을 거부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패션 현상으로 볼 수 있죠. 더 기가 막힌 점은 거대 유행을 거부한 소수의 스타일이 거대 유행의 시작이 된다는 점입니다. 유행이 소멸에 가까워지면 유행했던 것과 다른 새로운 것이 유행이 될 텐데, 그 새로운 것들이 대부분 소수의 스타일에서 엿볼 수 있는 거죠.(월드클래스 몇몇 디자이너가 동성애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지 않을까... 감히 추측합니다. 어떤 디자이너들은 영감을 얻기 위해 동성애자 클럽과 바를 간다고 하죠)
옷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옷에 관심이 없는 것뿐 다른 물건이나 가치관 같은 무형의 형태로 다른 사람과 구별 짓기를 하고 새로운 것을 찾고 다닐 겁니다. 트렌드에 민감한 패션 리더도 최신 스타일은 혼자만 누리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구별 지을 새로운 트렌드를 찾고 다니죠.
이렇게 패션에 관심이 없는 사람, 패션에 관심이 적당히 있는 사람, 패션에 관심이 많은 사람, 패션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 모두가 패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패션은 사람에서 시작되고 거대 패션 업계가 아무리 다양한 스타일을 만들어도 유행으로 채택하는 건 우리이며 유행을 끝내는 존재도 사람입니다.
패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니까 뭔가 불쾌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고른 옷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처럼 들리니깐요. 제가 말하고 싶은 점은 패션 현상을 눈치채고 즐겨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즐겨야 할까요? 패션의 본질을 마주하고 자기 자신을 찾고 지키는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게 옷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합니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여줄지, 나를 드러내는 컬러는 무엇인지 생각하며 옷을 고르고 만져보고 입습니다. 쇼핑을 하는 게 아니고 자아를 탐색하는 것이지요. 패션에도 인문학이 있다는 게 이 점에서 느낍니다.
그렇다면, 쓰나미 같은 패션 현상 앞에서 어떻게 나를 찾고 지켜야 할까요? 유행을 접하고 옷을 사 입으면서 나와 어울리는 옷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옷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한다면 많은 옷을 사고 입어봐야죠. 자아 탐색 측면에서 유행을 마주하여 다양한 옷을 입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유행을 역이용하는 거죠. 그다음,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은 '유행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영원한 자신의 스타일이라는 말로 해석합니다. 캐주얼, 스포티 등 다양한 이론적인 스타일을 넘어 자신의 고유 스타일 말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상의는 셔츠만 입고 하의나 신발은 유행하는 아이템으로 교체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양한 유행하는 아이템과 스타일 중에서도 자기를 보여주는 것들로만 선택했죠. 어글리 슈즈와 와이드 팬츠가 유행하지만 어글리 슈즈는 신지 않고 와이드 팬츠는 입는다는 것처럼 말이지요. 거기에 자신의 시그니처인 셔츠를 더하니 새롭고 고유한 스타일을 만들었습니다.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지킨 거죠.
패션 현상은 지구에 혼자 살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습니다. 패션 현상은 넓고 빠른 급류 같아 우리를 덮치고 생각할 틈도 없이 어딘가로 떠내려가게 만듭니다. 우리는 패션의 본질을 알고 패션이라는 거대한 흐름에서 나를 지탱하는 뿌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패션 현상을 의식하며 나를 찾고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옷을 고르고 입는 일이 새롭게 다가오고 더욱 즐거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