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질체력이 느낀 등산의 매력
1. 애증의 취미, 등산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또 산에 왔을까.' 등산 중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면 꼭 이런 생각이 든다. 자타공인 저질체력인 내가 침대에 누워있기를 포기하고 산에 오르는 이유, 등산을 싫어하면서도 꾸준히 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우선, 한여름을 제외하면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산에 가려고 노력한다. 친구랑 단둘이서 우리만의 등산모임을 만들어 '건강클럽'이라 이름 짓고, 한동안 월 1회 이상 정기모임을 가졌다. 청주에 있는 친구를 보러 갔을 땐 우암산 등산을 했고, 광주에 있는 동생을 보러 갔을 땐 무등산 등산을 했다. 또 안내버스를 타고 혼자 전북 진안으로 떠나 마이산 등산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주 산에 오를 정도로 열정적인 것도 아니다. '미지근한 온도로 꾸준히', 이것이 내가 등산을 오래도록 취미로 가질 수 있는 방법이다. 당연히 저질체력에게 등산이란 쉽지 않은 취미다. 7시간 동안 하산하지 못해 노을 질 때쯤 겨우 내려온 적도 있고, 한여름 땡볕에 등산하다가 정신이 혼미해지기도 했다(절대 따라 하지 마시오). 단 한 번도 산이 쉬웠던 적은 없다. 늘 힘들었고, 매번 쉽지 않았다. '쉬운 등산'이란 내게 존재할 수 없는 단어였다. 그래서 나는 등산을 '애증의 취미'라고 부른다. 등산 과정의 대부분이 즐겁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등산'을 취미로서 꾸준히 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질체력이 느낀 등산의 매력에 대해 써 보았다.
2. 산에서는 쉽게 '우리'가 된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끼리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정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모른 척 구는 것이 익숙해진 요즘 시대. 특히 내향인에게 스몰토크란, 생각만 해도 당황스러운 상황이 아닐까. 그런데 산에서는 그런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상황이 생각만큼 당황스럽지는 않다. 마치 원래 아는 사이인 듯, 말을 건네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다. 산에서 만난 사람과는 자동으로 공통분모가 생기기 때문이 아닐까. 모두 등산을 위해 이 산을 찾아왔고, 정상이라는 목표를 향해 오르고 있다는 것, 혹은 각자의 목표를 달성하고 내려오는 길이라는 것. 한 걸음씩 힘겹게 오르고 있노라면, 이미 정상을 찍고 하산 중인 등산객들이 "파이팅", "얼마 안 남았어요". "다 왔어요 힘내세요!"등의 응원을 건네준다. 오르는 길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에 건넬 수 있는 응원이겠지. 한 번은 이런 적도 있다. 친구와 내가 처음 가 본 산의 하산길이 헷갈려 방황하고 있자, 우리를 지켜보던 등산 고수께서 직접 앞장서서 숨겨진 지름길로 안내해 주셨다. 장장 30여분 간의 하산길을 함께하며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혼자 등산하는 것을 즐기신다는 것, 최근 산에서 발목을 삐끗해 한동안 등산을 쉬셨다는 것, 우리가 현장체험학습을 온 학생인 줄 알고 선생님께 데려다주려고 지름길을 안내하셨다는 것(그 등산 고수분께서는 상상력이 풍부하신 걸로 보아, N이 분명하다) 등등... 30분 전까지는 서로 전혀 모르던 사이였는데 어느새 친밀감이 쌓인 것이 신기했다. 친구와 나는 지금까지도 그분을 등산 선생님이라고 부르며(실제로 안전하게 하산하는 법을 가르쳐주시기도 하셨다) 계속 등산을 하다 보면 언젠가 산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한다. 이외에도 신발끈이 풀린 걸 보면 위험할까봐 바로 알려주고, 정상에서 서로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사탕과 초콜릿 같은 간식을 흔쾌히 나누는, 그곳이 바로 산이다. 산에서는 남이었던 사람도 쉽게 '우리'가 된다. 내가 계속 산을 찾게 되는 이유 중 하나다.
3. 내 템포대로, 한 걸음씩
저질체력에게 등산이란, 결국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턱끝까지 차오르는 숨도 내 것, 터질 것 같은 허벅지도 내 것, 송골송골 맺히다 못해 흐르는 땀도 내 것이다. 특히 저질체력이라면, 함께 간 일행들과 어느새 멀어지고 혼자만의 걸음을 내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면 자신을 기다리는 일행을 만나게 되겠지만. 정상까지 누군가에게 업혀가지 않는 이상, 나는 내 두 다리를 믿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살면서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기분과 체력의 한계를 경험할 일이 얼마나 될까. 늘 산에서 나 자신과 싸우며 내가 배운 태도는 '멀리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처음부터 산꼭대기를 바라보고 오르기 시작하면 내가 내딛는 걸음들이 하찮게 느껴진다. '이렇게 걸어서 어느 세월에 도착하나' 생각하게 된다. 반대로 멀리 있는 목표를 바라보는 대신, 고개를 숙여 내 발을 바라본다. 걸음들이 쌓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살아난다. 무등산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날도 어김없이 혼자 뒤처져서 헥헥대며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도저히 못 갈 것 같아 멈춰 섰을 때, 뒤따라오시던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그렇게 힘들어?" 얼굴이 벌게진 내가 우스우면서도 안쓰러웠는지 할아버지께서 말을 건네셨다. "네 너무 힘들어요." 겨우 대답했다. "빨리 갈 필요 없어. 멈추지만 마. 너무 힘들면 제자리에서라도 걷는 거야. 그러면서 쉬는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는 처음으로 '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 있다는 걸 배웠다. 그동안은 숨이 조금만 차도 우뚝 멈춰 서거나 주저앉았고, 그럴 때마다 다시 출발하는 게 더 힘들어졌다. 할아버지께서는 주저앉지 않고도 쉬는 법을 알려주셨다. 쉬었다가도 언제든 다시 출발하는 법도. 그 이후로 나는 나 자신과 싸우기보다, 내 템포에 맞춰 걷는 방법을 익혀갔다. 적어도 나에게 등산이란, 누군가와의 순위 경쟁도, 기록 싸움도 아니니까.
4. 고생 끝에 오는 성취감
등산하며 느끼는 온갖 고난과 역경이 온전히 내 것이라면, 정상에서 느끼는 성취감 역시 온전히 내 것이다. 나의 두 다리로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는 뿌듯함, 인고의 시간을 겪은 뒤 마침내 마주하는 하늘 위에서의 풍경. 가슴이 뻥 뚫리고 벅차오르는 그 기분에 도취하여 기어코 다음 산을 오르게 된다. 정상에 도달하는 순간에 푹 빠지다 보니, 자연스레 정상에서의 시간을 정성 들여 준비하기 시작했다.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 가 정상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 당을 보충해 줄 바나나 혹은 고구마 한 개, 산 정상에서 먹을 때 가장 맛있는 김밥 한 줄까지. 내가 나를 위해 준비한 한 상을 차리고 나면, 힘들었던 순간들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다. 내 노력을 내가 알아주는 것이다. 이렇듯 정상에 도달하는 것은 내게 등산의 가장 큰 목표이다.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는 경험은 내게 '할 수 있다'는 감각을 심어준다. 크고 작은 성취의 순간들이 모여, 자기 확신을 만든다. 앞으로 어떤 높은 산을 만나도 결국엔 정상에 다다를 것이라는 확신, 내 능력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이러한 '자기 효능감'은 산 밖의 일상에서도 발휘된다. 실패하더라도 빠르게 회복하여 다시 도전할 힘이 생기고, 어려움을 맞닥뜨렸을 때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해낼 거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정상에서 맛본 작지만 확실한 성취감들이 차곡차곡 쌓여, 삶에 임하는 나의 태도를 바꿔놓은 셈이다.
5. 애증이 애정이 되기까지
그동안 산을 오르며 인상 깊었던 순간들, 느꼈던 감정들을 되짚어보며 도대체 내가 왜 계속해서 등산을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거기에는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따뜻함과 강인함, 그리고 성취감이 있었다. 타고난 저질체력으로 힘들어 죽을 것 같아도 또 다음에 오를 산을 찾게 되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산에서 인생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으려는 건 아니다. 그런 걸 찾으려는 목적으로 산을 오르게 되면, 등산이 더 힘들어질 테니까. 대신 그 해답을 찾아가는 데 필요한 태도를 배웠다. 어려움을 맞닥뜨렸을 때 묵묵히 나아가는 태도,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만의 속도를 유지하는 태도 같은 것들 말이다. 다음번엔 또 어떤 산을 오르게 될까. 분명 힘들겠지만, 그만큼 또다시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줄 거라는 걸 안다. 애증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나는 이미 등산을 애정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