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유발 노아 하라리(1976년생)는 이스라엘 출신의 역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옥스퍼드에서 중세 전쟁사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며,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등을 통해 전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중 최고는 바로 사피엔스 일 것이다.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사회, 문화, 기술변화의 관점으로 대중적인 언어로 풀낸 역작이다. 오늘은 사피엔스의 내용을 소개하려고 한다.
하라리가 처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아프리카 사바나 변방에서 포식자들이 남긴 고기를 먹으며 근근이 생존하던 사피엔스는 어떻게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를 3가지 혁명으로 제시하고 있다.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가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조상은 불을 사용했고, 직립보행을 해 도구를 사용할 수 있어으며, 덕분에 뇌가 커졌다. 그래서 먹이사슬의 최상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는 다르다. 석기는 250만 년 전에 처음 사용했고, 불은 30만 년 전부터 일상적으로 사용했지만 사피엔스는 여전히 약한 동물이었다. 무엇이 우리를 최상위 포식자로 올려놨을까?
호모 사피엔스는 약 250만 년 전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인지혁명은 약 7만 년 전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인지혁명이란 호모 사피엔스의 의사소통 새로운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우리의 언어는 무엇이 달랐을까? 첫 번째로 눈여겨 볼만한 점은 뒷담화이다. 우리는 타인의 뒷담화를 하는 것을 나쁜 일로 인식하고 있지만 뒷담화는 사실 생존에 필요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정보전달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저기 언덕 밑에는 포악산 사자가 살고 있다" 든 지, "저쪽 숲에는 먹을 수 있는 과일이 많아" 같은 정보말이다. 그러다가 타인의 평판도 나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저 친구는 성격이 괴팍해", "저 친구는 다른 사람을 잘 도와줘" 같은 정보들은 무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사결과 이런 뒷담화는 무리를 150명 정도까지 유지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그 이상에는 효과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 언어에 다른 무언가가 특별한 것이 또 있다는 의미다. 정보 전달이 뭐가 특별할까? 육지에 사는 동물이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손가락사에에 물갈퀴, 수중호흡이 가능한 폐가 필요하다. 그것을 만들기위해서는 진화가 필요하가 수만년이 걸린다. 그런데 인간은 말로 그 과정을 대체한다. 만약 어떤 사피엔스가 떗목을 만들고 돗을 만드는 법을 터득했다면 바로 다음 자손에게 그 정보를 전달해줄수 있다. 진화의 과정을 생략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지혁명이란 인류 역사가 생물학에서 독립을 선언한 지점이었다.
우리 언어의 진정 특별하 점은 허구를 말하고 또 믿는 능력이다. "사자는 위험해"라는 말은 정보 전달에 불과하지만 "사자는 우리의 조상이야"라는 말은 허구를 만들어내 전달한 것이다. 허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바로 사피엔스만의 특별한 능력이다. 침팬지한테 "그 바나나를 나에게 주면 너는 죽어서 천국에 갈 거야"라는 말을 해봤다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을 믿는다. 종교, 국가, 법인, 자본주의, 민주주의, 인권. 이것들은 우리가 믿는 대표적인 허구들이다. 이런 것들로 인해 사피엔스는 사피엔스는 대규모 협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능력이다. 난생처음 보는 두 사람도 같은 신을 믿는 다은 이유로 십자군 전쟁에서 서로를 도우면서 싸운다. '그들을 우리로 만드는 능력' 이것이 핵심이다.
두 번째 혁명은 약 12,000년 전에 일어난 농업혁명이다. 농업 이전의 사피엔스는 밀, 과일 등을 채집했을 것이다. 과일은 바로 먹을 수 있었지만 밀은 껍질을 벗겨내는 등 손질이 필요했다. 그래서 정착지로 옮겼을 것이고 그 와중에 밀 몇 알을 떨어졌을 것이다. 몇몇 사피엔스는 떨어뜨린 밀알이 다시 밀로 자라나는 것을 눈치챘다. 그렇게 농업혁명은 시작되었다.
농업을 터득한 사피엔스는 경작지를 늘려 생산을 늘려나갔고 더 많은 사피엔스를 먹일 수 있었다. 그래서 더 큰 무리를 형성해 더 나은 생활을 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농업이다. 하지만 하라리는 반대의 의견을 피력한다. 하라리는 농업이야 말로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고 말한다. 농업은 인간이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밀이 인간을 길들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밀을 땅을 일구고 벌레를 잡고 물을 준다. 밀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또 평균적인 농부들은 평균적인 수렵채집인 보다 더 많이 일했으면서도 더 적게 가져갔다. 더 다양하지 않은 음식을 먹었고 따라서 전염병에도 약해졌다. 또한 더욱 폭력적이 되었다. 수렵채집인은 갈등이 생기면 도망칠 수 있었지만 농업인은 농지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이 올라갔다. 그렇다고 수렵채집인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처음 농업을 시작하자 먹을 것이 풍부했고 더 많은 아이를 낳았다. 더 많은 아이를 위해 더 많은 땅을 경작했고 그러자 일손이 부족해 더 많은 아이가 필요해졌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니 농업인의 수가 늘어나 다시는 수렵채집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더 불행해졌음에도 말이다. 물론 농업을 시작한 지 몇 세대 이후의 농업인은 자신의 조상보다 불행하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한다. 그렇더라도 개별 사피엔스가 더 불행해졌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것이 농업 혁명의 핵심이다. 농업혁명은 DNA관점에서 사피엔스를 부흥했지만, 개별 사피엔스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농업 혁명 이후 인간의 어떻게 지구를 정복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인류는 어떻게 자신들을 대규모 협력망으로 엮었는가?" 사피엔스는 너무 빨리 진화한 탓에 호전적이 되었다. 사자나 호랑이는 몇 만년에 걸쳐 먹이사슬의 최고 꼭대기로 올라간 반면 사피엔시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늘 불안해했고 공격성이 올라갔다. 농업 혁명은 대량의 사피엔스를 먹일 수 있는 음식을 제공했다. 하지만 농업이 협력을 부추기지는 않았다. 무엇이 인류를 협력하게 만들었을까? 이전에 인지혁명으로 인류의는 사실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써 협력이 가능해졌다고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제국, 돈, 종교다. 제국은 우리가 같은 나라의 국민이라는 믿음을 주었고 종교는 우리가 같은 신의 은총을 받았다는 믿음을 주었다. 그리고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정점이다. 국가, 종교, 문화가 다른 사람이라도 돈을 벌기 위해서는 협력할 수 있다. 제국, 돈, 종교 서로 관계가 없는 사피엔스들을 협력시키기에 이만한 것은 없었다. 이것이 '그들을 우리'로 만든 매개체였다.
세 번째 혁명은 500년 전 일어난 과학혁명이다. 1500년 지구에 살아던 사피엔스의 수는 5억 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70억 명이 산다. 바로 과학 혁명 덕분이었다. 그런데 중세에도 과학은 존재했다. 중세의 과학과 현대의 과학은 무엇이 달랐을까?
가장 큰 차이는 모르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중세의 지도를 보면 빈 공간이 없다. 분명 가본 적이 없는 곳이라도 무엇으로든 채워 넣는다. 반면 과학혁명 이후 지도를 보면 빈 공간이 나타난다.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했지만 죽을 때까지 그곳을 인도라고 생각했다. 무지를 인정하지 않은 콜럼버스는 여전히 중세인이었다. 최초의 근대인은 아메리고 베스푸치로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이 우리가 아는 곳이 아닌 전혀 새로운 땅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빈 공간이 가득한 지도를 만들었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니 발전이 생겼다. 무엇이 인류로 하여금 무지를 인정하게 만들었을까? 역시 신대륙의 발견이 한몫을 했다. 신대륙은 기후도, 환경도, 동물도 구 대륙과는 달랐다. 기존의 지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무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학은 신대륙의 발견 이후 제국주의의 배를 타고 급속하게 성장했다. 과학이 발전하는데 제국주의의 공이 컸다는 것이다. 그 못지않게 과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이 있다. 바로 자본주의다. 근대 이전에는 '성장'이란 것이 거의 없었다. 우리가 아는 땅은 정해져 있고 인구, 자원도 정체되어 있었다. 그래서 뭔가를 위해 투자를 하는 경우가 없었다. 프랑스가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선 독일의 것을 훔쳐오는 수밖에 없었고, 내 빵집이 잘되기 위해선 다른 빵집의 손님을 뺐어올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한정된 파이안에서 나눠 먹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과학 혁명 이후 바뀌었다. 신대륙의 새로운 금, 은, 자원과 노예들은 파이를 키워주었다. 파이가 늘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투자를 하기 시작했고 '신용'이란 것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은행에 가서 말한다. "나에게 돈을 빌려주면 사업을 시작해 더 많은 돈을 벌어 갚겠다". 중세에는 이런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한정된 파이에서 사업이 커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신대륙 발견 이후 많은 탐험가들이 국가 혹은 은행에 신용으로 돈을 빌리고 신대륙을 개척해 나갔다.
여기까지 사피엔스가 지구를 정복할 수 있었던 세 가지 혁명. 인지, 농업, 과학혁명의 발생 과정을 지켜보았다. "사피엔스는 엄청나가 번성했고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로 책이 끝났으면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라리는 독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책을 쓴 것은 아닌듯하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무엇일까? 어떻게 사바나 변방의 직립보행을 할 뿐 특별할 것 없이 근근이 살아가던 영장류가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일까? 책의 대부분이 사피엔스의 지구정복과정을 설명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그래서 우리는 대단하다'라는 결론을 내리기에는 섣부르다. 우리가 대단한지에 대한 대답은 간단한 질문 만으로도 막혀버린다. "사피엔스는 지구를 지배했는데 사피엔스 A 씨는 더 행복해졌는가?" 분명 유아사망률이 줄고 평균수명이 늘기는 했지만 자살률 역시 늘었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인지 농업 과학은 과연 인류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책을 읽기 전이라면 분명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후에는 분명하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닭이라는 종은 종의 번영관점에서 보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지금의 닭들은 a4용지 한 장 크기의 공간에서 생활하다 30일 만에 죽는다. 회색코뿔소는 몇 마리가 남지 않았다. 종의 관점에서 보면 실패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회색코뿔소는 자신이 마지막 종이라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초원에서 풀을 뜯다가 갈 뿐이다. 공장에 있는 닭보다 행복하다는 것이다. 인지, 농업, 과학 혁명은 사피엔스종이 지구를 지배하도록 만들었지만, 개별종의 행복은 고려하지 않았다. 평균적인 농업인은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불안해하고 더 많이 일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놀라운 항해술과 의학을 발전시켜 평균수명을 늘렸지만 식민지배를 받은 이들에게 과학발전은 지옥이었다. 닭을 보고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피엔스를 보고도 같은 감정을 느껴야 한다. 자본주의는 어떨까? 자본주의 역시 파이의 크기를 키웠지만 빈부격차는 더 커졌다. 농업혁명 인지혁명이전의 사피엔스와 현재의 사피엔스 중에 누가 더 행복할까? 인지혁명 전의 인류라면 행복한지를 생각하지조차 않을 것이다. 그저 생존하려고 최선을 다할 뿐이다. 자연상태에서 동물이 자살을 하는 경우는 없다. 반면 현대의 사피엔스는 자살을 하기도 한다. 찝찝하지만 '우리는 더 행복해지지 않았으며 불행해졌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어 보인다.
왜 그럴까? 왜 더 불행해졌을까? 공동체의 붕괴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가축화된 모든 동물의 불행은 진화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행동습관을 하지 못하게 할 때 발생한다. 자연에서 송아지는 어미소와 놀이를 하고, 어미소는 다른 황소들과 유대 관계를 맺도록 진화했다. 그래야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함으로 인해서 골반이 작아졌고 따라서 출산이 위험한 일로 바뀌었다. 자연스럽게 더 빨리 출산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빨리 태어난 아이는 어른의 돌봄이 다른 동물보다 많이 필요했다. 어른 한 명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인간의 사회성은 여기에서 기여한다. 우리는 DNA에는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고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가 남아있다. 그러나 현대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새로운 보편적 신념으로 채택해 어릴 때부터 주입한다. "부모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우리 조상이 공동체생활을 하던 습관과 현재 우리의 생활이 상충된다는 것이다. 개인주의와 자유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라리는 어떤 것이라고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옳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생물학의 관점에서 우리가 불행한 이유를 서술할 뿐이다.
비교군이 커진 것도 우리의 불행에 한몫을 했다. 중세에는 동네에 있는 같은 또래의 3명과만 비교하면 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SNS, TV, 전광판 등에서 나와 나이가 비슷하지만 지구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만약 모든 정보를 차단해 다른 사람과 전혀 비교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행복은 정말로 자기기만에 달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사실들을 보면 사피엔스가 지구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행복은 고려되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은 맞지 않을까? 민주주의, 인권 같은 보편적 믿음들은 분명 우리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끌어 줄 것 같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언젠가 우리가 지금 믿는 것이 뒤집어질 수도 있다. 인종주의가 그랬듯 말이다. 인종주의자들은 흑인보다 백인이 생물학적으로 우월하게 타고났다고 믿었다. 하지만 과학은 그것이 거짓임을 밝혔다. 인권이라는 것은 어떨까? 현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인류가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한 세대이다. 이것은 바뀌지 않을까?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우리가 믿는 인권이라는 것. 그러나 과학은 우리 안에서 인권이라는 것을 찾지 못했다. 영혼이라는 것도 찾지 못했다. 만약 과학기술로 무한한 수명을 가지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모든 인류에게 그 혜택을 제공해도 될까? 부분적으로만 적용해야 한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 돈일까? 만약 무한히 사는 인류와 100년 남짓 사는 인류가 공존한다면 인권이라는 개념은 두 부류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까? 우리 지금 믿고 있는 보편적 제도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역시 무한한 선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피엔스의 번영을 추구해야 할까? 개인의 행복을 추구해야 할까? 보편적 가치의 올바름을 추구해야 할까? 행복을 추구한다면 물질을 추구해야 할까,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의 역할이 중요할까? 화학적 행복을 추구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아야 할까? 여기에 대한 답을 내리기도 전에 우리는 또 특이점을 맞이하고 있다. 인공장기, 생명공학, AI의 등장으로 새로운 인류로 탄생하는 길목에 서있다. 아직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금 하는 일이 옳은 일인지를 알지 못하는데 신이 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호모사피엔스는 지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생명체이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할 뿐더러 만족하지도 못한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만족하지 않는 신이라니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있을까? 사피엔스는 답을 찾아야 한다. 이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역사의 흐름에는 진화처럼 정해진 답이 없다. 다만 우리는 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어야 할 것이다. 하라리는 답을 제시하는 책을 쓴 것이 아니다. 질문을 던지는 책을 쓴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늙지 않고 무한히 생존하며, 뇌를 컴퓨터로 연결할 수 있는 신인류가 되고 싶은가? 조만간 우리의 신체뿐만이 아니라 욕구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것이 호모사피엔스의 마지막 세대인 우리가 결정을 답해야 할 질문이다. 우리 다음세대는 이 질문의 대답에 따라 창조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