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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투독 Sep 09. 2024

사실은 누구보다 살고 싶었던 인간의 이야기: 인간실격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서로 속이면서,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 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더라면 제가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를 하지 않아도 됐을텐데 말입니다.”

사람들은 부유한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요조를 보며 행운아라고 말했지만 그런 것들은 되려 그를 더 자괴감과 자기혐오에 빠지게 할 뿐이었습니다. 물론 행복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단지 하나의 사실만이 궁금했습니다. '어떻게 세상 사람들은 이런 많은 가식과 모순, 위선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연히 가족과 친구 어디에서 소속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살아가기 위한 가면이 바로 익살스러움. 그는 말 그대로 수동적 봉사정신을 발휘해 익살스러움을 연기했고 나름 성공적이었습니다. 담당 검사의 동정을 조금이라도 받아보려 각혈로 위장한 기침을 하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가면이 벗겨지기 전까지는요. 때때로 자신의 이런 익살스러움이라는 가면이 벗겨질 때에는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가식과 위선 가득한 세상에 살기 위해 가면을 쓰고 연기했지만, 어쩌면 자신도 그 속에서 그들처럼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의 자기혐오, 연민. 요조는 정말로 생에는 미련이 없었습니다. 진심으로 그는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그 사람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죠. 

기침까지 요란하게 보태어 기침을 한 후에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검사 얼굴을 흘깃 본 순간. “진짜야?” 조용한 미소였습니다. 진땀이 석 되 흘렀습니다. 아니 지금 생각해도 꽉 죽고 싶어 집니다.



요조가 남을 무서워하면 할수록 남들은 요조를 좋아해 주고, 남들이 요조를 좋아해 주면 좋아해 줄수록 요조는 두려워지고 모두한테서 멀어져야만 하는 이런 상황. 요조는 스스로를 점점 고립시키고 자기 연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자기 연민으로도 나름 세상을 살아갈 수는 있었습니다. 모두 요시코 덕분이었습니다. 요시코는 신뢰의 천재였습니다. 순수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만들면 요시코와 같은 모습일 겁니다. 어렴풋이나마, 나름 인간 다운 것이 되어서 비참하게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희미한 바람이 처참히 부서져버린 것은 자신에게 일거리를 주는 놈에게 요시코가 겁탈당하는 장면을 요조가 목격하고 나서였습니다. 익살스러움이라는 연기를 인간과의 연결고리로 삼았던 요조는 더 이상 인간연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연기가 더욱 고통스러워졌습니다. 인간들은 가면이나마 쓰고 살아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가면은 완벽하게 부서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자기 연민조차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가면이 사라지자 자기파괴만이 남았습니다. 쓰는 것은 힘들고, 벗겨지면 부끄러운 그 가면은 사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도구였던 것입니다. 요 커버, 이불 홑청은 장식품이라고만 생각지만. 사실 이것들은 단지 인간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서글퍼졌던 어린 요조. 이제 어쩌면 자신의 익살스러움이라는 가면조차 자신이 생을 연장하기 위해 만들어낸 실용적인 물건이었다고 생각했겠지요. 요조는 아내 요시코에 의해 정신병원에 들어갔습니다. 희미한 기대감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이제 저는 죄인은커녕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니요. 저는 결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아아, 그렇지만 광인들은 대개 그렇게들 말한다고 합니다. 즉 이 병원에 들어온 자는 미친 자, 들어오지 않은 자는 정상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인간실격. 저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실격의 요조를 보고 많은 이들이 공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연민일까요, 동정일까요. 가면 속 그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쳐서 일지도 모릅니다. 요조는 사실 다자이 오사무 작가 자신입니다. 요조에게 자신을 모습을 투영해 그러낸 작가처럼, 독자들도 요조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다섯 번째 시도만에 스스로 생을 끊은 작가. 후기의 마지막 내용에 마음에 걸립니다. 줄곧 부끄러움, 자기 연민, 외로움, 무력감, 익살스러움이라는 가면을 말했지만, 마지막에서는 다른 사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 착한 아이라고 표현한 것은 왜였을까요.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예요.” 마담이 무심하게 말했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 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IF

세상의 가식과 모순, 위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요조. '목숨을 부지한다'라는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요조. 생에 미련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요조라는 사람은 어쩌면 누구보다 노력했던 것은 아닐까요. 만약 누가 인간의 무리 속에서 살아가는 요령을 알려주였다면, 아니 인간이 요조에게 조금이라도 신용할만한 대상이었다면,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요. 만약 요조의 가면이 끝내 부서지지 않았다면 생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요. 그의 가면은 그를 괴롭히는 족쇄이자 동시에, 그를 보호하는 방패였습니다. 가시 돋친 가면일지라도 쓰고 살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요조를 보면서 누군가는 불완전한 삶이라고 말하겠지만, 어차피 삶이란 것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었나요? 애초에 완전한 삶이란 누가 정하는 건가요? 요조의 말마따나 세상이 아니라 인간들이 인정하지 않은 것이겠지요.

"그건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네가 용서하지 않는 거겠지."
 "그런 짓을 하면 세상이 그냥 두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자네겠지."
 "이제 곧 세상에서 매장당할 거야."
 "세상이 아니라 자네가 나를 매장하는 거겠지."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예전보다 다소 제 의지 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금 멋대로 굴게 되었고 쭈뼛쭈뼛 겁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인색해졌습니다.

불완전한 삶도, 완전한 삶도 없습니다. 개인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개의 삶이 있는 겁니다. 세상의 기준에 맞출 필요도 없습니다. 애초에 그 기준은 누가 만든 건가요. 만약 누군가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다'와 같은 말을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기준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다른 사람이 당신을 자괴감에서 자기연민으로 이어지는 자기파괴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도록 두지 마세요.

인간실격. 이것은 생을 이어나가고자 했던 한 남자가 피나는 손으로 가시 돋친 가면을 잡아 피나는 얼굴에 위에 올려놓고 발버둥 치는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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