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갈림길 앞에 서서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는 말을, 대개 수긍하는 편이다. 그때 그 순간 나의 판단이란 언제나 그 시간 동안 쌓인 모든 ‘나’의 총체적인 판단이니까. 이후에야 더 많은 시간이 축적되며 당시의 판단이 ‘틀렸었다’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때의 내겐 그것이 최선이라는 말. 달리 말해 인간은 자신의 삶을 1인칭으로 살아낼 따름일 뿐, 삶의 바깥에서 그것을 관찰하듯 바라보고 판단할 수는 없으니까.
2. 1인칭의 판단이라도, 모든 판단이 틀리진 않는다. 때론 그저 그런 선택지를 택하기도 하고, 지나고서 봐도 정답에 꽤 근접한 선택지를 택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하지만 이런 선택들이 때때로 내리는 틀린 판단들을 정당화해주진 않는다. 흔히들 하는 후회의 순간들은 언제나 있다는 말. 이럴 때면 클리셰로 점철되어 닳고 닳은 문장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곤 한다. ‘그때 그러지 말았더라면’. 그래, 내 삶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많은 ‘그러지 말았어야 할’ 순간들이 있었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3. 구체적인 일을 밝히자니 문자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을 만치 부끄러운 일들이니, 아주 추상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한마디’라고 줄여 부를 수 있겠다. 그 무수하던 ‘한마디’ 중에서 비교적 근래에까지 쓰던 것을 하나 꼽아보자면 이런 말이 있다. 내게 소중하던 지인에게도 서슴없이 내뱉던, ‘나는 개인을 믿지 않는다’란 말. 개인 간의 유대가 얼마나 강하건, 결국 어떤 인간관계일지라도 대수 법칙에 따라 가장 평범하기 짝이 없는 형태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추상적이면서도 의미 없는 이야기.
4. 설혹 이 말에 꽤 그럴듯한 의미가 있었다 한들, 게 무슨 대단한 통찰씩이나 된다고, 그러니까 그 말을 들은 상대 마음의 균열에 비하자면야 정말 하찮고도 별 볼 일 없는 한마디에 불과한 것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아니 하지 않는 게 나았을 말 한마디들. 말을 하는 내게도 듣는 상대에게도 어떤 득이 되지 않는다. 그저 나의 뾰족함, 쓸데없을 만치 못돼 먹은 뾰족함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었던 듯 던지는 한마디에 불과하다. 이다지도 무의미한 말을, 난 참 많이도 하고 살았다. 지금 와서 보자면 간단하고 명료하게 당시의 나를 평가할 수 있겠다. 난 정말 어리석었다고.
5. 본문의 흐름과 무관하지만, ‘나는 개인을 믿지 않는다’라는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말인지. 이 생각을 할 때마다 내 어리석음에 경악할 정도이다, 사족이되 몇 마디 붙여본다. 이것은 전형적인 자기실현적 예언이다. 이 말을 내뱉는 나 스스로는 나름의 이유와 맥락을 가지고서 입을 벌리고 떠들어댔다. 하지만 사실상 이 말 자체가 관계에 균열을 만들고 차츰 무너지게 만드는, ‘믿지 않는다’라는 말을 자체 진행시키는 말이다. 특별함은 그 관계를 믿는 사람들의 사이에서만 유지된다. 그 관계를 지탱하는 유일한 원동력은 믿음뿐이다.
6.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그때와 달리 현명한 인간이 되었는가 하면 물론 그렇진 않지만, 적어도 그때보단 덜 어리석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나는 지금보다도 어렸고, 나의 쓸모나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을, 혹은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니까, ‘그때의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것이라고. 그때 들쑤시고 만신창이를 내버린 관계들은 지금도 아깝고 안타깝지만, 심지어 여전히 사무치기도 하지만. 하지만 그때 그러지 않을 수 있는 나는, 적어도 그 시점의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었다.
7. 이런 의미에서 죽기 직전까지 완성되지 않을 내 인생에도 무수히 많은 실패가 있었고, 지금도 메워지지 않은 실패의 자국 역시 적지않이 있다. 여기서 이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망할 인생아, 정말 어쩌라고. 그런 동시에 ‘앞을 보며 뒤를 생각하는’ 수밖에 없음을, 여실히 절감하게 된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의 결론을 식상하게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어’ 따위의 뻔한 자기 위로를 말하려는 건 물론 아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과 별개로, 이런 종류의 문제들은 벌어진 이상 무슨 짓을 해도 수복 불가능한 경우가 극히 대부분이니까.
8. 그러니 할 수 있는 말은 겨우 이 정도일 것이다. 이 사무치게 아깝고도 안타까운 과거들을 지금보다 나은 선택을 위한 주춧돌, 아니 이끼를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딛고서 저마다의 가장 중요한, 혹은 마지막 지점에 다다라서만큼은 웃을 수 있도록 선택을 쌓아가는 것. 이 이상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없을 것 같다. 지금의 나로서는 말이다. 더불어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내일의 나는 조금 더 근사한 답에 닿을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