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서모임의 지원금 분투기

독서모임의 독립출판 지원금을 받기까지

by Readraw

립 책방에서

서 모임하며

립 출판한 이야기

“책을 읽는 자리에서 출발해, 쓰기와 그리기, 출판과 전시로 이어진 여성작가 읽기 모임 기록입니다.”




잉크 냄새 진한 책을 쥐었을 때의 감격은 찰나였다. 문장들이 '책'이라는 물성을 갖기 위해선 감당해야 할 비용이 있었다.

출판사에서 하나의 책이 나오기까지 편집자, 디자이너, 인쇄소... 전문가의 손길이 닿는 모든 공정은 곧 선명한 '비용'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에 반해 독립출판물은 제작자가 대부분의 역할을 맡음으로써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린 읽고 쓰는 순수한 즐거움으로 시작한 모임이었다.


매달 걷는 만 원의 회비와 ‘제작비’라는 숫자가 선명해질수록 누군가에게 떠나야 할 이유가 될까 두려웠다. 모임을 지탱하려 시작한 일이 도리어 와해의 불씨가 될까 봐, 그 화살이 나를 향할까 봐 마음은 속절없이 출렁였다.


독립출판이라는 판을 벌인 당사자로서 느끼는 책임감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우리 프로젝트 취지와 부합하는 대전문화재단의 [생활문화 활성화 지원사업] 공고였다. 신규 단체로 선정 시 100만 원. 우리의 독립출판을 현실로 바꾸기에 더없이 적정한, 그리고 절실한 액수였다.



대전문화재단 [생활문화 활성화 지원사업]

시민 일상 속 문화향유를 확대하고 지역 생활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사업.
아마추어 문화예술단체에서 필요로 하는 다양한 생활문화 활동을 맞춤형으로 지원.







행정의 문턱을 넘다


공모 사업에 뛰어든다는 건, 평소 쓰던 언어를 완전히 바꾸는 일이었다. 우리는 사랑과 상실, 삶의 이면을 탐구하는 문학 작품을 읽어왔지만, 지원서에는 '지역 문화 활성화 기여'나 '기대 효과' 같은 딱딱한 행정 언어를 채워 넣어야 했다. 시적인 문장들을 지원서 네모 칸에 맞춰 숫자로 치환하는 과정은 마치 낭만적인 연애편지를 영수증 처리하는 기분이었다.


육아의 끝자리, 눅눅해진 몸을 이끌고 서류 뭉치와 씨름할 때면 '그만둘까'라는 말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내게 남는 게 무엇인지, 이 수고의 값이 얼마인지 따지고 드는 냉소가 무형의 가치를 지키고 싶은 열망을 자꾸만 갉아먹었다.


그때,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일으킨 건 그 지루한 행정 절차였다. 멈춰있던 나의 사회적 시계가 다시 돌아가고 있다는, 세상과 연결되고 있다는 기묘하고도 선명한 증명.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단톡방에 물었다.


"지원금을 받으면 제작비 부담이 없어져요. 우리, 이번에도 한번 만들어 볼까요?"


흩어질까 겁냈던 내 손을 잡아준 건 멤버들이었다. 글쓰기를 주저하던 이들이 먼저 보내온 용기는 마음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다. 우리는 다시, 기꺼이 같은 배에 올랐다.





구불구불한 선들, 우리를 잇는 단단한 마디


공적인 지원을 받는 길은 '행정'이라는 낯설고 딱딱한 문턱을 넘는 일이었다. 마감 직전, 서류 한 장에 멤버들 서명이 누락된 것을 발견했을 때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당일 오후 6시까지 보정 서류를 제출하라는 통보를 받고 다급히 단체 채팅방에 구조 요청을 보냈다.


"여러분! 지금 바로 종이에 서명해서 사진 찍어 보내주세요. 6시 마감이에요!"


스마트폰 화면 위로 멤버들 서명이 속속 도착했다. 펜 종류도, 종이의 질감도, 글씨의 기울기도 제각각이었지만 단 하나는 분명했다. 누구 하나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


그 구불구불한 필체들을 보며 깨달았다. 독립출판이라는 이 지난한 과정은 나 혼자 짊어진 숙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지켜내고 싶은 ‘우리의 판’이었다는 걸. 혼자였다면 포기했을 문턱을, 이름 석 자들이 모여 가뿐히 넘게 해 주었다.


그 간절함이 통했을까. 우리 모임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신규 단체로 선정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마지막 관문인 ‘고유번호증’을 발급받으러 간 세무서에서, 안내를 돕던 한 어르신이 내게 말을 건넸다.


"이건 무슨 단체예요?"
"아, 저희는 여성 작가 문학을 읽고 책을 만드는 단체예요. 이번에 지원금을 받게 되어 등록하러 왔어요."
"그래요? 난 색소폰을 부는데, 이런 지원이 있으면 우리도 더 신나게 불 수 있을 것 같네. 내년엔 한번 알아봐야겠어."


색소폰 부는 노신사와 글 쓰는 여자들. 접점이라곤 없을 듯한 우리 사이를 관통한 건 '지속하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이었다. 누군가는 숨을 불어넣어 소리를 만들고, 누군가는 문장을 찍어내어 삶을 기록한다. 그분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며 깨달았다. 우리 모임은 이제 단순한 사교를 넘어, 이 지역 문화를 구성하는 단단한 마디가 되었음을.






은빛 카드의 무게, 그리고 차가운 예감


며칠 후, 지원금이 든 은빛 체크카드가 도착했다. 카드 전면에 새겨진 'WOMENS WRITERS BOOK'이라는 영문명이 낯설고도 선명했다. 멤버들은 고생했다며 축하를 건넸지만,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카드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이 카드를 긁는 순간, 우리의 글쓰기는 더 이상 순수한 유희일 수 없다. 공적 자금이 투입된 프로젝트이자, 누군가의 귀한 시간을 담보로 한 약속이 된 것이다. 기획자로서의 책임감이 은빛 카드의 광택만큼이나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즐거움이 숙제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는 이제 기분 좋은 긴장을 넘어, 반드시 완주시켜야 한다는 결연함으로 바뀌었다.


행정의 문턱을 넘었으니 이제 정말 잘 읽고, 쓰고, 만드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일은 가장 안온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틈새를 드러낸다. 본격적인 쓰기를 위해 우리가 집어 든 책은 하필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이었다. 그리고 그 '최전선'에서 우리는 각자의 밑바닥을 마주하며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시즌 2의 막이 오르는 소리와 함께, 알 수 없는 서늘한 예감이 등 뒤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