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비밀』 『단 한 사람』 최진영 작가 북토크
독립 책방에서
독서 모임하며
독립 출판한 이야기
“책을 읽는 자리에서 출발해, 쓰기와 그리기, 출판과 전시로 이어진 여성작가 읽기 모임 기록입니다.”
시곗바늘을 되돌려본다. 눈이 펑펑 내렸던 김하나 작가와의 만남보다 조금 전 시간으로.
그곳엔 『구의 증명』, 그리고 우리 모임의 두 번째 책이었던 『단 한 사람』을 쓴 소설가 최진영이 있었다. 그녀의 첫 산문집 『어떤 비밀』의 북토크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간 읽어온 그녀의 문장들을 떠올리며 제멋대로 이미지를 상상했다.
뼛속까지 시린 겨울 바다에 몸을 던지는 듯한 상실과 죽음의 문장들. 연인의 시신을 먹으며 사랑을 증명하거나(『구의 증명』),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단 한 사람』)과 같이 무엇하나 쉬이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작가의 세계는 단순하고 납작한 어둠이 아니었다. 내게 그녀는 감정 깊은 곳을 어루만지는 서늘함과 따스함이 쌍을 이루는 작가였다.
최진영 작가를 떠올리면 심연을 알 수 없는 먹색 바다가 그려졌다. 차가운 파도에 휩쓸릴 준비를 하며 마주한 그녀는, 뜻밖에도 『어떤 비밀』 표지처럼 따스하고 보드라운 아이보리 비누색을 품은 사람이었다.
책을 펴자마자 만나는 문장처럼 그녀는 사랑, 사랑, 온통 사랑이었다.
"행복하자고 함께하는 사랑이 아닌,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함께하자는 사랑에게"
그날 밤을 그려본다. 주택가 골목 끝자락엔 가로등 몇 개만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짙푸른 어둠을 뚫고 하얀 책방 건물이 노란 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거친 바다를 헤매던 배를 부르는 등대처럼, 혹은 오래도록 집을 떠났던 이에게 건네는 다정한 환대처럼.
더 이상 의자를 둘 곳 없이 빽빽이 들어찬 책방 공기는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기대와 설렘이 뒤엉킨 채로.
"어떤 질문이 생기면 그 질문을 구하기 위해 써요."
"사랑을 계속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품고 『구의 증명』을 썼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답을 알고 싶었지요. 10년 전 제 마음은 그만큼 사랑에 대해 결연했던 것이고요."
- 2024.12.6 버찌책방 북토크 후기 참고 -
최진영 작가 북토크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마음속에는 줄곧 그려내고 싶은 얼굴 하나가 맴돌았다. 소설 『단 한 사람』에서 연기처럼 증발해 버린 인물, 차마 보내지 못한 '금화'였다.
최진영 작가는 금화가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죽었다고 쓰고 싶지 않았다"라고도 덧붙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십여 년 전의 참사 앞에서 멈출 수 없었던 질문들에 답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단 한 사람』과 금화를 써 내려갔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금화가 어딘가에 살아있기를, 부디 죽지 않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책을 덮고 나서도 일 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내 안에는 금화가 머물렀다.
북토크에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금화는 아주 짧게 등장하고 이르게 사라지는데도, 왜 이렇게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걸까요? 작가님에게 금화는 어떤 존재였나요?"
작가는 답했다.
"여러분 다 외롭지 않으신가요? 우리 모두 외로워요. 사람들이 금화에 대해 많이 질문하시는데 그 마음이 너무 예뻐요. 죽지 않길 바라며 책을 덮는 순간까지 걱정하고 궁금해하는 그 마음이요."
- 버찌책방 『어떤 비밀』북토크 Q&A 중 -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일 년 넘게 내 마음 한구석에 짐을 풀고 살던 금화가 비로소 환하게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금화가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를 상상하며 그림을 그렸다. 꿈속에서 동생에게 '언젠가 작은 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워주라'던 금화의 말을 떠올리며, 전해지지 못한 마음을 종이배와 종이 새 형상으로 화면 위에 눌러 담았다. 그것은 슬픈 증발이 아닌, 자유로운 여행이길 바라는 나의 염원이었다.
엄마가 나룻배에 실어 보낸 운동화를 신고 더욱 긴 여행을 떠나볼까 해.
엄마가 우는 건 싫으니까 꿈에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
외로운 내 마음을 껴안고 있던 엄마의 사랑을 기억할게.
언제나 사랑해 엄마.
- 『어떤 비밀』 65쪽 '금화의 편지' 중 -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이 그림과 엽서를 건넸다. 소설가의 문장이 독자 손끝에서 그림으로 변주되어 다시 소설가에게 돌아가는 기묘한 순간이었다.
"제 글이 이렇게 그림으로 되었네요. 감사해요."
보조개 쏘옥 들어가는 말간 얼굴. 나와 그림을 번갈아 바라보던 하얀 미소는 그날 밤 책방 공기보다 포근했다.
작가가 던진 슬픈 질문에 나의 그림이 답이 되어 돌아갔다. 활자가 선이 되고 선이 다시 마음이 되는 과정. 텍스트가 온기 있는 숨결로, 활자가 선명한 그림으로 바뀌는 순간을 목격하며 확신했다. 책이라는 지도를 따라 걷는 이 길이, 결국 나 자신을 가장 정직하게 마주하는 길이라는 걸.
그렇게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페이지를 열던 터였다. 우리는 다시, 함께 책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우리 책 시즌2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