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독립출판 보다 '비매품'으로

나아가는 글쓰기인 줄 알았는데...

by Readraw

립 책방에서

서 모임하며

립 출판한 이야기

“책을 읽는 자리에서 출발해, 쓰기와 그리기, 출판과 전시로 이어진 여성작가 읽기 모임 기록입니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요?"




모임에 가장 늦게 도착한 내가 농담 섞인 첫마디를 던졌다. 에어컨 차가운 바람 소리만 일정한 박자로 공간의 정적을 긁어내고 있었다.


그날 우리가 나누기로 한 책은 은유 작가 『글쓰기의 최전선』이었다. 평소라면 '은유 작가님 문장 너무 좋지 않아요?'라며 책장을 넘기는 소리로 소란했을 테이블 위에는, 채 마시지 않아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힌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차가운 유리잔들이 마치 멤버들의 서늘한 땀방울처럼 느껴졌다.


지난해 『해방의 밤』을 함께 읽어, 이미 은유 작가에게 매료되었던 우리였다. 쓰고 싶게 만들고, 기어이 나아가게 만드는 그 힘이 우리를 출판과 전시까지 이끌었다고 믿었기에, 오늘만큼은 어느 때보다 뜨거운 대화가 오갈 줄 알았다.


은유 작가는 글쓰기가 "매 순간 마주하는 존재에 감응하려 애쓰는 '삶의 옹호자'"가 되는 길이라 말했지만, 그날의 우리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우리에게 글쓰기는 '감응'이 아닌,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숙제'처럼 보였다. 늘 해사하게 웃던 ㄱ도, 단단한 버팀목 같던 모임장 A도 그날만큼은 낯설었다. 복직 후 수척해진 K와 무거운 발걸음으로 찾아온 O의 얼굴에도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글쓰기의 즐거움을 예찬하려던 자리는 금세 삶에 대한 비루함과 고단함을 토로하는 현장이 되었다. 누구보다 쓰는 일에 진심이었던 그녀들이 '쓰기의 고통'을 말하자 내 마음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늘 찍던 책 인증 사진조차 잊게 만들 만큼, 우리 사이엔 서늘함이 감돌았던 그날




입 모터와 불면의 밤


분위기를 띄우려 내 입은 쉬지 않고 돌아갔다. 나는 긴장할수록 텐션이 올라가고 말이 많아진다. '제발 닥쳐'라고 뇌가 비명을 질러도 입 모터는 멈출 줄 몰랐다. 억지로 뿌려진 농담이 공허하게 흩어질수록 마음은 더 눅눅해졌다.

집으로 돌아온 뒤, 물기 머금은 스펀지처럼 무거워진 몸으로 침대 위를 굴렀다. 새벽 4시, 어스름이 깔린 방 안에서 카톡을 쓰고 지우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내가 벌인 판이 이들에게 읽는 기쁨을 앗아간 건 아닐까?'

'독립출판이라는 건 내 욕망이지 이들의 욕망이 아니지 않았을까'


회피하고 싶던 진실이 똬리를 틀었다. 멤버들 피로도, 모임 온도 변화도 다 내가 무리하게 프로젝트를 추진했기 때문이라는 자책이 밀려왔다. 결국 신중히 언어를 고르고 골라 단체 톡방에 장문의 메시지를 남겼다. (아래는 그중 일부)


"여러분, 어제 만남 후 많이 고민하게 되었어요. 조심스럽게 제안드리는데, 이번 책을 내는 건 잠시 내려두면 어떨까요? 이 모임이 우리 삶의 '숨구멍'이어야 하는데, 숙제가 되는 건 원치 않아요. 지원금 반납 등 행정적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조금 더 느슨하게 우리만의 속도로 가봐요."
내가 보낸 장문의 카톡








다정한 독단: 비매품의 미학


장문의 카톡을 확인한 멤버들은 고맙게도 내 마음을 먼저 헤아려주었다. 다정한 위로가 오갔고, 다음 모임까지 각자 고민해 보자는 숙제를 남긴 채 채팅창은 잠잠해졌다.


그로부터 한 달여 시간이 흘렀다.


치열한 고민 끝에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어렵게 따낸 100만 원이란 지원금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수만 배 소중한 건 멤버들의 지치지 않는 마음이었다. 결국 '비매품'이라는 우회로를 찾기로 했다. 그 달의 모임 책인 올가 토카르추크 『다정한 서술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나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여러분, 오래 고민해 봤는데요. 이번 책은 '비매품'으로 만들면 어떨까요? 우리 일 년의 기록물로만 남기는 거예요. 글쓰기가 버거운 분들은 마음이 머물렀던 문장을 사진 찍어 보내주세요. 타이핑은 제가 하면 되고요, 이번만큼은 제 마음대로 한번 만들어 볼게요."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민주적인 절차는 가끔 가혹할 만큼 비효율적이다. 멤버들의 눈치를 보며 느릿느릿 침몰하느니, 차라리 내가 조금 더 수고로운 '다정한 독단'을 택하기로 했다. 글쓰기는 나의 간절한 욕망이지 그들의 의무가 아니었음을 인정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멤버들 얼굴에서 팽팽했던 긴장이 빠져나갔다. 공간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지자, 우리 독서 모임 본연의 색깔인 다정함과 활기가 되살아났다. 출판이라는 화려한 결과물보다 중요한 건, 함께하는 사람의 마음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이었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다정한 서술자』에서 "다정함이란 대상을 의인화해서 바라보고, 감정을 공유하고, 끊임없이 나와 닮은 점을 찾아낼 줄 아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비매품이라는 우회로는 타인의 피로를 내 것처럼 감각하며 찾아낸 나만의 다정함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서로를 옹호하는 서술자가 되어 각자의 자리를 되찾았다.




"글쓰기는 현명하고 흥미로운 사안들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과 늘 함께할 수 있게 해 준다"

토카르추크의 문장을 곱씹으며 내 곁의 친구들을 본다.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끝내 '읽고 쓰는 일'을 놓지 않으려 분투하는 이들. 그 치열한 고민을 공유하는 동료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에 깊은 안도감이 차올랐다.


우리의 '비매품'을 떠올려 본다. 세련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 안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시 기꺼이 길을 잃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돌아오는 길 차 유리창에 머리를 기댔다.


충만한 안도감 뒤로, 다시 마주해야 할 낯선 문장이 가방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로 다음 책인 김지승 작가의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였다.

때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 속에 있을 때 더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함께 읽었던 책 중 가장 높은 벽이었고, 가닿지 못했음에도 충분히 아름다웠던 어느 독서의 기록.


다음은 이해의 영역을 넘어 오직 감각과 그림으로만 남겨진 미로 속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