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마주한 높은 벽
독립 책방에서
독서 모임하며
독립 출판한 이야기
“책을 읽는 자리에서 출발해, 쓰기와 그리기, 출판과 전시로 이어진 여성작가 읽기 모임 기록입니다.”
독서 모임에서 어려운 책을 만나 끝내 어떤 말도 하지 못한 경험이 있나요?
'여성작가 읽기 모임'에서 함께 읽는 책은 늘 읽고 또 읽으며 음미하게 된다. 그런데 마지막 십여 페이지를 남겨놓고 결국 완독 하지 못한 첫 번째 책이 생겼다.
바로 김지승 작가의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다.
"여백(margin)에 있는 것들"이란 의미에서 파생된 마지네일리아는 책의 여백에 남기는 표식, 주석, 메모, 삽화, 분류할 수 없는 반응의 흔적들을 총칭한다." - 9쪽 -
생경한 단어인 '마지네일리아'에 대해 어렴풋이 헤아려 본다. 깨끗하고 온전한 지면이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여성 작가들이 여백에 메모를 남기며 억압을 뚫고 나온 말들을 떠올린다.
"직접 말할 수 없는 이들이 기다린다. DISEUSE가 등장한다. DISEUSE, 말하는 여자가 받아쓴다."
- 209쪽 -
다시 읽어도 도통 알 수가 없다.
이번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명확했다. 작년에 함께 읽었던 『짐승 일기』의 김지승 작가가 '버찌책방'에 온다는 소식이었다. 북토크를 앞두고 멤버들과 함께 이 책을 읽기로 했다. 하지만 정작 북토크 당일, 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
다녀온 멤버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해석이 필요한 난해한 책을 작가의 다정한 지성이 해소해 주었다고 했다. 덕분에 멤버들은 김지승 작가에게 '반해버렸다'며, '북토크 참가하길 잘했다'는 말로 단체 채팅방을 메웠다.
내가 가지 못했던 그 공간의 열기와 김지승 작가를 상상하며 책을 다시 펼쳤다. 하지만 그곳에는 다정한 대화 대신, 난해한 종이 미궁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멤버들이 경험한 뜨거운 '이해'와 내가 마주한 '불가해'. 그 사이의 거대한 간극이 나를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에게 이 독서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잃어버린 채 홀로 높은 벽을 짚으며 헤매는 것만 같았다.
함께하지 못해 못내 아쉬운 마음에 버찌책방 김지승 작가 북토크 후기를 읽어봤다.
"여성적 읽기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지 않아도 되어요. 판단하지 않습니다."
"여성적 읽기란 타자를 받아들이는 일이에요. 불평과 불안의 언어를 그대로 견뎌 보는 일에는 '함께' 느끼는 관계가 중요해요."
- 버찌책방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북토크 후기 중 -
그러다 문득, 한 문장에 멈춰 선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흘려보내요.
이해되지 않으면 '감각'하려고 해 보세요."
그 조언은 우리 모임이 마주한 거대한 절벽 앞에서 구원줄이 되었다.
그제야 우리 모임의 풍경이 다시 보였다. 가장 우아한 멤버 O는 도저히 읽히지 않는 챕터에 정성스럽게 'X'자를 쳐서 왔던 장면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미움이 아니라, 텍스트에 대한 경의를 담은 정중한 항복이었다.
반면 나는 모임에서 이해되지 않음을 분노로 표현했다. 책에 나온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를 읽고선 '잠결에 휘갈겨 쓴 일기' 같다고 했으니까. 미간 사이를 찌푸리며 읽어낸 분노의 기원이 '책을 이해 못 하는 나'인지 작가의 불친절함 때문 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돌아온 뒤, 어떤 부채감이 가득했다. 거칠게 뱉어낸 말들과 미지의 존재를 향한 본능적인 경외심. 그 사이에서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한 감정들이 뒤섞였다.
이 감정은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속 한 챕터인 「말과 물의 환영」(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 안에 머물고 있었다.
텍스트를 이해하려던 오만을 내려놓았다. 문장으로 끝내 곁을 내주지 않던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를, 선과 면이라는 나만의 언어로 그려내고 있었다. 이해를 포기한 대신 선택한 '감각하기'였다.
그리하여 미궁에서 돌아온 내 손은 리스펙토르의 얼굴을 자꾸만 그려내고 있었다.
또렷하고도 많은 이야기를 담은 눈과 얇지만 굳게 닫힌 입술을 그렸다. 가장 기본 선(線)인 연필로 손에 힘을 빼고 보이는 대로 훅훅 그려냈다. 그리면서 흑백 사진을 보며 그녀가 바른 립스틱 색을 상상하기도 했다. 버건디일까? 아니면 레드? 어쩐지 고단하지만 찬란했던 그녀 생이 눈앞에 다가온 것 같았다.
머리로는 거부했던 텍스트가 손끝을 타고 종이 위에 안착했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림을 그린다는 건, 이유 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과 같았다. 내 독서 인생에서 가장 큰 전복이었다.
이 '아름다운 불통'의 경험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두 번째 책의 뼈대가 되었다. 첫 번째 책이 '무엇을 읽었는가'에 집중했다면, 이번 책에는 '이해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기록'을 담았다.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문법이다. 하지만 이해와 별개로 오래 남게 된 건 감응'이라 남겼다.
미궁 속에서 길을 잃는 일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곳은 감옥이 아니라 새로운 독서의 지형이 시작되는 곳이었으니까. 머리로 정복하려던 오만을 버리고 온몸으로 문장을 받아내며, 나는 함께 읽기의 힘을 믿게 되었다. 끝내 넘지 못한 페이지들이 오히려 우리를 더 넓은 감응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었다.
실타래를 가다듬으며 미궁 속을 걸어 나왔다. 이제 이 실타래로 한 권의 책을 직조해 나가는, 두 번째로 하게 된 디자인과 편집 작업은 어땠을지. 그때로 시곗바늘을 돌려본다.
미로에서 나온 문장과 그림은 종이를 만나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