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어냄으로 완성된 표지 이야기
독립 책방에서
독서 모임하며
독립 출판한 이야기
“책을 읽는 자리에서 출발해, 쓰기와 그리기, 출판과 전시로 이어진 여성작가 읽기 모임 기록입니다.”
책 한 권을 직접 낳아본 뒤, 세상의 책은 더 이상 글자로만 보이지 않았다. 손끝에 잡히는 단단한 물성, 그 속에는 누군가의 고단한 밤이 쌓아 올린 치열한 선택들이 담겨 있었다.
읽기, 쓰기, 합평, 디자인, 표지 그림 작업, 그리고 인쇄 제작까지. 첫 번째 책으로 기성 출판에서 다루는 과정 중 유통과 홍보를 제외한 모든 영역을 얕게나마 다뤄봤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무모했지만, 그 단순한 용기가 두 번째 책을 밀어 올리는 연료가 되었다.
두 번째 책을 준비하며 구매하고 빌려보는 모든 책들이 내겐 레퍼런스가 되어주었다.
표지의 감촉과 여백의 공간, 페이지 번호 위치, 폰트 디자인과 크기까지. 모든 책은 제 각각으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디자이너와 편집자는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책을 만들었을까?
자연스레 이 질문은 책을 구상하는 내내 맴돌았고 관심어린 손으로 만져보고 살펴볼수록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고 싶어 제작비가 비싸더라도 무코팅 수입지로 만들었구나.'
'페이지 번호가 가운데 오니, 책 모서리를 접어도 몇 페이지인지 알 수 있구나'
'소제목과 챕터 제목을 본문에 표시하지 않으니 오히려 글에 몰입이 잘 되네.'
책방에서 책을 넘기다 말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무코팅 수입지의 거친 질감에서 제작비의 압박을 이겨낸 제작자의 고집을 읽었고, 정중앙에 놓인 페이지 번호에서 독자의 손가락 위치를 배려한 다정함을 보았다. 모든 책이 나의 스승이었다.
오히려 많은 요소를 뺌으로써 글과 내용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지난 책에선 친절히 하나하나 다 남겨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부수적인 요소가 글의 몰입을 방해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머릿속에서 한 책을 구상하며 다다른 이번 책의 콘셉트는 '덜어내기'였다.
지난 책의 표지는 버찌책방 서가 풍경을 색연필로 꾹꾹 눌러 담았었다.
(지난 책 표지 작업 이야기는 아래)
https://brunch.co.kr/@readraw/38
작업실에 앉았다. 첫 번째 표지를 그리고 두 번째 표지를 마주하기까지, 우리에겐 네 번의 계절이 흘렀다. 다시 차가워진 손끝을 호호 불며 물끄러미 재료들을 바라보았다.
수백 가지의 색연필 뒤에 숨은 연필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오롯이 흑과 백으로 그려낼 수 있는 재료인 연필과 흑연 가루. '덜어내기'의 미학을 구현할 가장 기본적이고도 올곧은 재료가 아니던가.
'그래, 이번 표지 작업은 흑과 백으로만 표현해 보자.'
하얀 종이 위에 검은 흑연 가루를 쌓고 밀어 넣어 점과 선과 면을 그렸다.
색을 덜어내니 그림이 오히려 말을 걸어왔다. 빽빽하게 채워야 한다는 강박을 지워낸 자리엔, 흑연의 서늘한 농담과 헐거운 여백만이 남았다. 그 가벼움은 나에게 무엇을 더 채울지가 아니라, 어디까지 비울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 가장 밀도 높은 수업이었다.
『우리가 머문 문장들』이번 책의 제목이였다.
첫 책을 만든 이후, 다양한 책의 표지 그림을 유심히 봤다. 꼭 제목과 내용을 대표하지 않더라도 어떤 '정서'를 담아낸 표지들이 많았다. '독서모임 에세이'라고 해서 책이 표지 그림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정서가 맞닿는 그림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음을 알았다.
처음에는 책을 읽으며 활짝 웃는 우리의 얼굴을 그리려 했다. 하지만 '머물다'라는 단어를 곱씹을수록 입가에 걸린 미소보다, 문장 앞에 멈춰 선 고요한 등줄기가 떠올랐다. 무언가에 깊이 머무는 사람은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그 시간을 견디거나 즐길 뿐이다. 그림 속 여자의 굽은 어깨 위로, 이름 모를 문장들이 내려앉는 장면을 상상하며 스케치를 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느덧 우리 멤버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서로의 진심을 알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이 연필 끝을 타고 새겨지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표지 그림으로 하나를 더 그렸다. '머물던 문장'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그림을.
두 개의 그림을 두고 골똘해졌다. 인디자인을 켜고 표지 디자인 작업을 해봤다.
물끄러니 그림을 바라보니 색이 빠지고 여백이 생긴 자리엔 '생각의 빈칸'이 생겨나 있었다.
거친 무코팅 수입지의 느낌을 구현하고 싶어 낡고 오래된 종이 질감을 노트북 폴더 안에서 찾았다.
모니터 속 가상의 종이 위에 그림을 앉히고 오른쪽으로 1mm, 다시 왼쪽으로 2mm. 제목의 위치와 그림의 여백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찰나를 찾아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우리 멤버들이 책을 읽으며 문장 아래 밑줄을 긋던 그 마음을 담아, 제목 아래에도 묵직한 선 하나를 그었다.
그렇게 우리 표지가 탄생했다. 덜어냄에 대한 고민과 동시에, 기성 출판 책같은 만듦새가 되도록 고민했다. 비록 전문 디자이너나 편집자의 손길을 닿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우리만의 색을 담고 여백을 두려 했다.
이제 표지를 넘겨, 책 속을 채운 나의 내밀한 드로잉들을 꺼내 놓으려 한다.
다음 화, 이 연재의 마지막 페이지에서는 책 속에 숨겨진 드로잉들과 함께 우리의 첫 번째 단원을 매듭지으려 한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열렬히 읽고 있으며, 벌써 세 번째 책의 빈 페이지를 상상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