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였던 드로잉의 흔적
독립 책방에서
독서 모임하며
독립 출판한 이야기
“책을 읽는 자리에서 출발해, 쓰기와 그리기, 출판과 전시로 이어진 여성작가 읽기 모임 기록입니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한 뒤로 오롯이 집중해 그림을 그릴 시간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손을 놀릴 수는 없어 머릿속에서 부유하는 생각들이 찰랑거릴 때마다 틈틈이 드로잉 노트를 채워 나갔다. 마침 중학교 자유학기제 특강을 준비하던 터라, 나의 시선들이 드로잉 노트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어떤 책들은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때로는 서늘한 감정으로, 때로는 선명한 이미지로 마음에 고인다. 그럴 때면 머릿속을, 아니 가슴 한쪽을 깊게 퍼내어 종이 위에 쏟아내야만 그제야 '완독'이라는 의식이 끝나는 기분이 들었다.
내게 드로잉은 읽어낸 문장들을 체화하는 방식이었고, 독서는 다시 빈 종이를 마주할 용기를 얻는 과정이었다.
우리의 두 번째 책을 위해 모임장은 정성껏 카테고리를 나누고 책을 선정했다. 문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그녀의 선구안을 우리는 열렬히 지지하며, 그 곁에서 함께 취향의 층위를 쌓아갔다.
1부 '좋은 어른'에서는 김소영의 『어떤 어른』과 클레어 키건의 『이토록 사소한 것들』을 읽으며 생을 마주했던 기억들을 꺼내놓았다. 계엄이라는 어지러운 시국 속에서 나눈 '좋은 어른'에 대한 대화는 유독 짙고 뜨거웠다. 각자에게 스쳐갔던 좋은 어른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까지 나눴던 시간.
2부 '실타래'에서는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에서 시작해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두 책은 마치 한 권처럼 실타래로 끈끈이 엮여 있다.), 그리고 여성 SF 소설의 바턴을 이어받아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이어지며 독서의 광활한 확장을 경험했다.
3부 '계절의 얼굴'은 백수린 『봄밤의 모든 것』 『여름의 빌라』와 강화길 『치유의 빛』을 통해 문장 속에서 봄의 온기와 서늘하지만 따사롭기도 한 여름의 감각을 피부로 느끼는 시간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속내를 작가가 속이는 것만 같아, 다종다양한 의견이 오고 가며 해석 또한 분분했던 열광적인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치유의 빛』 속 지수는 과연 정말 뚱뚱했던 것일까? 아닐까?)
4부 '나아가는 글쓰기'에서는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과 올가 토카르추크 『다정한 서술자』를 통해 글을 쓰는 진심에 대해 고민했다. 무참해지기도 했지만, 끝끝내 쓰고 만들고야 말았던 우리. (이와 관련 다른 연재에서 다뤘다.)
https://brunch.co.kr/@readraw/48
마지막 5부 '기억의 자리'에서 작년에도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와 『짐승일기』로 함께한 이주혜, 김지승 작가의 신작 『여름철 대삼각형』과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를 읽으며 작가들의 시선을 따라갔고 또 지난 우리만의 기억을 톺아보았다. 이 과정에서 이주혜, 김지승 작가와 다시금 버찌책방에서 북토크를 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그때그때 메모하듯 끼적인 드로잉과 단상들이 '책'의 꼴을 갖게 되자, 어쩐지 그림도 글도 더 열렬히 읽어내고 싶어졌다.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로 나누던 '교환일기'의 정서를 담고 싶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여백을 넉넉히 두었다.
철저히 우리만을 위한 비매품이었기에 누릴 수 있는 무한한 자유였다. 비록 이 책을 만드는 여정에서 경제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우리의 1년을 한 권의 책으로 압축해 냈다는 보람은 그 무엇보다 단단한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
이 책은 우리의 모임 장소인 '버찌책방'에 비치하여 책방 손님들이 필사할 수 있도록 두었다. 책방의 창가에 시트지로 인쇄된, 우리가 여태껏 함께 읽었던 작가들의 이름이 빛날 때, 비로소 우리의 시즌 2가 완성되었음을 실감했다.
그동안 브런치에 연재해 온 <독서모임에서 우리가 만든 건>을 여기서 매듭지으려 한다. 더 쓰고 싶은 이야기도 많지만, 다음 페이지를 위해 남겨두기로 했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상정하고 글을 쓰는 일은 늘 짙은 안갯속에서 운전대를 잡은 것처럼 두렵고 막막했다. 하지만 안개가 걷힌 자리에 남은 것은 타인의 문장이 아닌, 어느새 부쩍 자란 나의 시선이었다.
혼자만의 만족으로 끝나버릴까 조바심도 났다. 그럼에도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완주해 냈다는 사실이 뿌듯하게 한다.
그리고 이 작은 성취는 아이를 키우며 잠시 놓아두었던 본업, 즉 '그림'으로 나를 다시 데려다 놓았다. 이제 나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반려동물들의 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엮어내는 새로운 에세이 프로젝트를 시작해보려 한다. 말 없는 다정한 존재들, 반려동물들의 눈동자에 담긴 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엮어내는 일.
타인의 문장을 받아 적던 손으로 이제 나의 세계를 온전히 그려낼 용기를 얻었으므로.
https://brunch.co.kr/magazine/nunu-petdra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