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 - 생생히 살아있는 육체에 죽은 정신
조화가 된 청춘
청춘의 존재감이란
한 줄 평 : 생생히 살아있는 육체에 죽은 정신
키 워 드 : 무기력한 청춘은 존재하는지 아닌지 모호하다.
영화는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가 무언지 질문한다.
영화 버닝 소개(출처 : 네이버 영화)
유통회사 아르바이트생 종수(유아인)는 배달을 갔다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해미(전종서)를 만나고, 그녀에게서 아프리카 여행을 간 동안 자기가 키우는 고양이를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스티븐 연)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종수에게 소개한다. 어느 날 벤은 해미와 함께 종수의 집으로 찾아와 자신의 비밀스러운 취미에 대해 고백한다. 그때부터 종수는 무서운 예감에 사로잡힌다.
“숫놈은 맛이 없어. 맛이 없고 쓸모가 없어. 그러니까 우리는 꼭 쓸모가 있어야 되는 거야.”
영화 ‘미나리’에서 제이콥(배우 스티븐 연)이 아들 데이빗(배우 앨런 김)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는 꼭 쓸모가 있어야 하는가?
내가 일하는 심리상담센터에서 만났던 청년 하나가 진지하게 물었다.
“제가 쓸모없으면 죽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쓸모는 누가 정할까? 어떤 상태가 쓸모있는 걸까? 우리 사회에서는 저마다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중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쓸모의 기준이 꽤 계산적이다. 돈으로 환산된다. 연봉과 재산이 대표적이다. 우리는 돈을 벌지 않으면 무능력하기에 당장 생이 끝나야 하는가? 독자의 답도 ‘No’일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청년은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느꼈을까? 아마 사회의 기준에 자기를 끼워 맞췄기에 쓸모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 무가치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무능력 => 무가치감 => 무기력한 상태가 설국열차처럼 끝없이 순환하는 청춘들이 많아졌다.
영화 ‘버닝’에서 이런 청춘들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요즘 청춘들은 이미 N포세대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청년기로 진입한다. 과연 무엇을 포기했을까? ‘취업’, ‘결혼’, ‘자녀’도 포기했지만 가장 큰 상실은 존재감이다. 그들의 몸은 분명 다 자라 감각은 생애 최고로 생생하다. 그들의 신체는 절정기인데 마음은 사망 선고를 받은 듯하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창동 감독은 여러 상징을 통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경계를 말하고 싶은 것같았다. 해미(배우 전종서) 집안에 들어오는 찰나의 햇빛은 남산 타워에서 반사되어 몇 분 동안만 유지된다. 종수(배우 유아인)와 해미의 성관계와 자위행위는 잠깐의 쾌락이다. 벤(배우 스티븐 연)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는 5분도 안 타는 시간 동안 가슴 먹먹해지는 취미다. 셋이 함께 나눠 피우는 대마초의 몽롱한 환각 경험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들이 청춘이라는 이름 속에 찰나로 존재한다. 그것들이 내가 살아 있다는 걸 가까스로 느끼게 해준다.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살아있다는 느낌에 집착하게 된다.
세 인물을 차례로 보자.
벤은 모든 것이 풍족하여 권태롭다. 결핍이 있어야 감사도 의욕도 있는데 마지못해 사는 삶이다. 벤은 자신의 인생에서 늘 사라지고 싶었다. 생의 그 어느 것도 의미가 없다. 벤의 유일한 취미는 사라지고 싶은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에게는 쓸모없는 비닐하우스 하나쯤은 불태워 없애거나, 정말 죽고 싶지만 죽을 수 없는 사람 하나 사라져도 되는 것이다. 벤은 비닐하우스와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에게 그들이 사라지길 바란다고 자기의 욕망을 투사한다. 제일 사라지고 싶은 건 자신이었다. 증발하고픈 사물과 사람을 사라지게 만드는 건 벤이 신처럼 결정한다.
벤은 제물로 희생될 여자를 한 명 고른다. 지인을 불러 모아 해미(배우 전종서)의 이야기를 듣게 한다. 해미는 끊임없이 얘기하지만 떠다니는 말일 뿐, 타인과 소통되지 않는다. 대화가 아니다. 청자는 관심 있는 척하는 행동과 지루함 속에 화자가 마치 없는 것처럼 대하고 이 상황을 만들어놓은 설계자인 벤은 지루하다는 듯 하품한다. 이 여성들의 공통점은 겉보기에 감성적이며 눈물과 말이 많다. 자기 속에 함몰되어 있으며, 외롭다. 끊임없이 말하지만, 그녀의 말은 허공에 흩어져 사라질 뿐, 주위 사람들의 귀로 들어가지 않는다. 거기에는 약간의 추임새와 맞장구만 있을 뿐, 모두 그 여자가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 여성을 투명 인간처럼 대하지만, 종수만큼은 이 상황을 무력하게 그저 지켜본다.
마지막으로 혼자만의 세계에 있는 듯 애처롭고 위태로운 해미(배우 전종서)를 보자.
약자를 먹이 삼아 돈을 착취하는 카드회사가 해미를 부유(浮遊)하게 만든다. 해미는 한국 사회에 벗어나면 무언가 살아갈 이유를 찾지 않을까 싶어 아프리카로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부시맨의 의식을 보고 깊이 감동받는다. 해미는 벤과 그의 친구들 앞에서 부시맨의 리틀 헝거에서 그레이트 헝거로 변하는 과정을 처절하게 춤으로 보여준다. 춤을 통해 그녀는 살아있음을 느끼는 물리적인 배고픔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종수(배우 유아인)가 나오는 장면은 다큐멘터리 같다. 대부분 청년이 이렇게 살고 있다.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다. 일부러 카메라를 흔들리게 찍은 듯 흔들리는 청춘을 잘 나타냈다. 종수의 아버지는 감옥에 있고, 어머니는 자신을 돌보지도 않았으면서 몇 년 만에 나타나 500만원만 빌려달라고 한다. 분노를 씹어 삼키며 헛헛해 보이는 종수, 어머니를 보는 찰나의 살기 어린 눈빛은 나만 느껴졌던 걸까? 종수는 글을 쓰고 싶어 한다. 그의 소설은 진전이 없고 아버지를 위한 탄원서를 쓰는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다. 종수가 가끔 노래를 불러주었던 젖소가 떠날 때의 텅 빈 눈동자에 종수의 모습이 겹친다.
종수는 해미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자기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거부한다. 물류창고에서 일렬로 세워져 번호로 불리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갖는다. 해미의 안부가 궁금해 그녀를 찾아 나선 것이지만, 소극적으로나마 자신의 존재마저 해미처럼 사라질까봐 두려워한다. 종수와 해미는 뭔가를 해보고 싶었지만, 시도할 기회 자체가 박탈되었다. 사회에 내딛는 첫발부터 마이너스의 늪이다. 어른들은 “너희는 젊으니까 맘껏 시도해봐.” 하지만 막상 시도했을 때 실패하게 되는 사회구조가 개인을 무력하게 만든다.
‘버닝’ 속 청춘들은 살아있어도 산 게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다. 눈에는 보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있다. 이창동 감독이 말하고 싶은 건 이게 아니었을까? 생생하게 살아있는 육체로 죽어있는 정신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걸. 그래서 해미의 결말을 관객에겐 끝끝내 보여주지 않은 채 영화를 끝내지 않았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벤이 처음엔 놀라고 원망스러워하다 결국 종수에게 고마워하는 듯한 눈빛이 뇌리에 박힌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버닝>
ps. 버닝에 나오는 안개 또한 멀리서 보면 그 실체가 드러나지만, 청춘의 늪처럼 가까이에선 눈에 보이지 않는다.